
박민희 기자
[세계를보는눈]
지난 25일 걸프지역의 작은 왕정국가인 바레인에서 ‘주목받지 못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이 나라 전체 인구 73만9천명의 10%가 넘는 8만명(주최측 추산)이 수도 마나마에서 평화행진을 벌이며 현재 국왕이 임명하는 슈라(국가자문회의)에 종속돼 있는 의회에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하고 헌법을 개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바레인 정부는 허가 없이 행진을 벌였다며 시위 주동자들을 처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최근 ‘중동 민주주의’ 확산에 목청을 높이고 있는 조지 부시 미 행정부가 이 사태에 대해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기묘해 보인다. 이는 최근 이 지역을 휩쓸고 있는 ‘중동 민주주의’ 구상의 딜레마와 이중잣대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30여개 섬으로 구성된 바레인은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석유가 발견된 석유부국이며 금융중심지다. 시아파가 70%를 차지하지만 18세기부터 수니파 알 칼리파 왕조가 줄곧 권력을 독점해 왔다. 현재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가 왕위에 오른 뒤 2001년부터 ‘입헌군주제’ 국가로 변신해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제한된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사회 불평등을 비판하던 인권운동가들을 잇따라 체포하고, 온라인 토론방에 정부 비판 의견들을 올린 젊은이들을 투옥했으며, 25%에 이르는 실업률 속에 항의시위를 준비하던 운동가들을 체포하는 등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있다.
미국은 “중동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명분 아래 이라크를 침공했고 이란 인권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딕 체니 부통령의 딸로 국무부에서 중동문제를 총괄하는 엘리자베스 체니가 시리아 반체제그룹 시리아개혁당(RPS) 관계자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리아 체체 전복기도 논란도 일고 있다.
민주화에 적극적인 미국이 바레인에 대해 유독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레인에는 중동 주둔 미군 제5함대의 사령부가 있어 4500명의 미군이 배치돼 있으며, 미 중부사령부의 해군과 해병대 기지도 이 곳에 있다. 미국 기업들은 바레인 석유산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미국이 중동 민주화를 꺼내기 훨씬 전부터 이 지역 국가 내부에서는 왕정의 부패, 부와 권력의 독점, 인권탄압에 저항하는 여러 자생적 움직임들이 있었다. 많은 친미 아랍 정권들은 이런 움직임을 억압하고 정권 유지를 보장받는 대가로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고 지원함으로써 국민의 분노를 샀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의 확산을 불렀다. 미국이 자신의 편에 선 비민주적 정권에도 공평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 때 진정한 중동민주화와 개혁이 시작될 것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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