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석방”에서 “안전 최우선”으로
국무부 브리핑 바뀌어
국무부 브리핑 바뀌어
한국인 피랍자 문제에 대한 질문이 연일 쏟아지고 있지만 톰 케이시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1일(현지시각) 테러세력에는 ‘양보 불가’라는 원칙에 변함이 없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선 “인질의 안전이 최대 관심사”라는 등 전향적인 말들도 나와 미 행정부의 미묘한 기류 변화를 엿보게 했다.
이날 케이시 부대변인의 외신기자클럽 브리핑에선 눈길을 끄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우선 인질에 대한 표현이 ‘무조건 석방’에서 ‘안전 최우선’으로 바뀌었다. 전자는 탈레반의 책임만 묻는 것인 반면, 후자는 미 행정부의 방침에 관한 것이다. 미 행정부는 그동안 공개적으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을 꺼려왔다. 인질의 안전이 최대 관심사라고 공표하면, 미국의 행동이 제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질 안전 확보를 위한 다양한 수단을 강구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안전을 해칠 수 있는 군사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의무가 따른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 듯, 케이시 부대변인은 군사작전 가능성에 대해 “확인해 줄 정보가 없다”며 부인했다. 그는 “그런 일은 인질들에게 해가 가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와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고 밝혀, 적어도 군사작전이 한국과 협의 없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또 그가 “한국·아프간 정부와 긴밀한 접촉을 하고 있으며, 인질들의 석방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라고 밝힌 점도 눈에 띈다. 설령 이 말이 실제 행동이 따르지 않는 ‘립서비스’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미 행정부가 기존 방침 되풀이만으로는 한국민과 한국 정부의 불만을 달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 6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릴 조지 부시 대통령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인질 문제가 논의될 것이라고 밝힌 점 또한 미국 쪽의 ‘성의’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에서 열린 아세안지역포럼(ARF)에 참석 중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한국·아프간 정부와 아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며 “(납치)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와 한국민들에게 큰 친밀감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 정부 당국자들의 이런 발언은 인질 사태 해결에 미 행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한국의 여론을 외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 여론이 미국 책임론이나 반미 정서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그렇지만 현재로선 미국이 공개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수감자와 맞교환’ 조건에 걸려 협상이 교착된 만큼 미국 정부가 방침을 급격히 바꿀 가능성은 없다. 아프간과 미국의 정상회담이 새 돌파구가 될 가능성도 크지 않다. 케이시 부대변인은 “인질 문제가 상세히 논의될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때문에 급한 불 끄기에 나선 미국은 한국 여론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물밑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대책을 한국 정부와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박중언 기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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