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교황 ‘유산’ 크게 작용한듯
진보-보수, 유럽-비유럽 간의 세 대결로 진통이 예상됐던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가 만 24시간, 4차례의 투표 만에 새 교황을 선출했다. 이 기록은 1978년 선출돼 33일만에 선종한 요한 바오로 1세와 같다. 3번째 투표만에 선출된 비오 12세(1939~1958)의 기록에는 뒤지지만 역대 최단 기록 중 하나다.
차기 교황 1순위로 꼽히면서도 극히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반대가 많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라칭거 추기경이 단시간에 새 교황에 뽑힌 배경은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의 후광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미국 필라델피아 대주교인 저스틴 리갈리 추기경은 19일 콘클라베 직후 “요한 바오로 2세와 가장 비슷한 후계자를 찾았다”며 추기경단의 분위기를 전한 바 있다. 이 점에서 ‘요한 바오로 3세’ ‘부교황’ 등의 별칭을 가진 라칭거 추기경이 전임 교황과 가장 닮은 꼴이다.
콘클라베에 참여한 115명의 추기경 가운데 2명을 제외한 113명이 보수적 성향의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26년 동안 임명한 추기경들이라는 점도 쉽게 합의를 본 요인이다. 제 3세계 출신의 추기경들조차 요즘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세속주의와 타종교로부터 도전에 단호한 라칭거 추기경의 신념에 쉽게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또 지난 23년 동안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바티칸의 2인자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오면서 보여준 라칭거 추기경의 지도력과 행정 능력, 안정감 등도 그른 선택케 한 또하나의 동인이다. 비타협적인 성향 때문에 적들이 없지 않았지만, 콘클라베에 앞서 이미 40~50표를 얻고 있다는 관측이 나돌 만큼 대외적인 명망에서 경쟁자가 없었던 셈이다.
지난 16일 78살 생일을 맞은 그의 나이도 전임 교황의 유지를 받들고 새천년의 새 교황으로서 새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과도적 교황’ 역할을 하는 데 적임이라는 평가에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세기의 클레멘토 12세와 더불어 역사상 최고령으로 선출된 교황이다. 류재훈 기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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