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북·이란 겨냥 “대폭 제한” 강요…비핵국들 "미·러부터 핵군축 필요”
5년마다 한번씩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이행 상황과 과제를 총점검하는 평가회의가 2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개막돼 4주간의 일정에 들어갔다.
핵국과 비핵국 간의 불평등을 전제로 출범해 핵확산 방지에 기여해 왔던 핵비확산 체제는 전례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올해 조약 발효 35돌을 맞아 7번째를 맞는 평가회의는 세차례의 준비회의에도 불구하고 핵국과 비핵국 간의 의견대립으로 의제를 확정짓지 못하는 등 어느 때보다 격렬한 난상토론이 예상된다. 교착상태 속에서 악화되고 있는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가 회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비확산과 핵군축, 안전조처협정, 소극적 안전보장, 비핵지대 등 전통적 의제뿐 아니라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 핵연료주기 통제, 추가의정서의 보편성 확보 및 검증 표준화, 평가회의 연례화 및 상설위원회 설치 등 핵확산금지조약 강화방안, 조약 탈퇴 제재 방안 등 새로운 쟁점들에 대해 격론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본회의에는 5대 핵국을 포함한 188개 조약 당사국과 유엔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11개 국제기구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도전받는 핵확산방지 체제 = 지난 5년간 핵확산금지조약을 중심으로 한 국제 핵확산 방지 체제는 몇가지 성과를 얻어냈다. 리비아의 핵포기 선언이나, 비국가행위자의 대량살상무기 취득을 금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540호의 채택(2004년 4월)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북한의 우라늄 핵무기계획 공방, 핵확산금지조약 탈퇴(2003년)에 이은 핵보유선언과 플루토늄 재처리를 위한 것으로 의심되는 영변 원전의 가동중단(2005년), 이란의 핵무기 개발 논란 등은 비확산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 2000년 6차 평가회의 최종문서에서 합의한 13개 이행 사항 중 핵무기 전면철폐를 위한 핵군축을 약속했던 미국 등 5대 핵보유국의 지지부진한 합의 이행 내지 이행 거부 태도는 ‘불평등 조약’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비핵국들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특히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는 △1996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조기 발효에 반대하고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을 일방적으로 폐기한 데(2001년) 이어 △비핵국에 대한 선제핵공격을 포함한 적극적인 핵전략을 담은 핵태세 검토 보고서(NPR, 2002년)를 채택하고 △10년 내에 핵실험도 필요없고 장기적인 비축이 가능한 신세대 핵탄두와 벙커버스터용 소형 핵폭탄(B-83) 개발을 추진하는 등 핵감축 약속 이행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은 또 이란과의 가스파이프라인 건설을 막기 위해 핵확산금지조약 비가입국이면서 핵무기보유국인 인도에 원전 수출을 제안하는 등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보유 규모는 2만7천기로, 35년 전에 비해 겨우 25%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맞서 러시아도 지난해 말 새로운 형태의 핵무기를 개발 중인 사실을 공개했고, 핵개발 의심국인 이란에 원전플랜트를 수출하고 있다. 중국도 미가입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에 원전 2기의 수출을 약속했다. 영국도 지난해 핵억지력 유지를 위한 미국의 지원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미-영 상호방위조약을 개정했고, 자위를 위한 최종적 상황에서 핵무기 사용을 공식화했다.
◇핵국과 비핵국간의 공방 = 좀더 안전한 세계를 위해 비확산 체제를 강화·보완해야 한다는 점에선 핵국이나 비핵국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나라마다 처방은 다르다.
‘세계의 반핵보안관’을 자임한 미국은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을 허용하는 허점을 노출한 핵확산금지조약의 강화와 조약의 불이행 문제가 주된 의제가 돼야 한다며, 북한과 이란 문제를 집중 논의하자는 태도이다. 특히 미국은 두 나라가 핵개발 명분으로 내세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NPT 4조)에 대해 포괄적으로 해석되는 규정의 범위를 대폭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평화적 이용의 범위’에 대한 문제가 이번 회의 최대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은 △군사용 전용이 가능한 농축·재처리의 신규참여 제한 △원전 등 핵기술을 새로 도입하는 나라들에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권한을 강화한 추가의정서 가입 의무화 등을 내세운다. 비핵국들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부정하는 행위라며 강력히 반발하면서 미국 등 핵보유국들이 5년 전 합의한 ‘핵군축 이행’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은 5년동안 새로운 농축·재처리의 금지를 제안해 놓고 있지만,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 핵시설보유국들도 자국의 핵계획의 차질을 우려해 반대하고 있다. 엘바라데이 총장은 국제원자력기구가 핵연료의 안정적 공급을 보장하면서 농축·재처리시설을 다국적 통제 아래 두자는 타협안도 내놓았지만, 이 제안 역시 핵선진국의 기술독점을 고착화할 뿐이라는 비핵국들의 반대에 직면해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의 조약 탈퇴 이후, 조약 탈퇴에 관한 규정(NPT 10조)을 강화하는 방안도 논란거리다. 준비회의에서 독일은 △핵안전조처협정 위반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의 의혹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땐 탈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을 제안했다. 또 △탈퇴 전 위반사항은 탈퇴 이후에도 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 안보리의 논의 대상이 되며 △평가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해 탈퇴 표명국을 출석시켜 의견을 들은 뒤 탈퇴를 인정하는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원자력기구의 기술협력 정지, 제3국이 제공한 핵기술·설비의 해체·철거 등 구체적 조처의 시행 방안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전망=평가회의 의장인 세르지우 대 케이로즈 두아르테(70) 브라질 군축·비확산담당 대사는 “핵국과 비핵국 간의 대립이 해소되지 않고 회의가 종결됐을 땐 비확산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핵확산금지조약의 세 축인 비확산과 핵군축, 평화적 이용의 목적에 부합하는 합의사항이 문서화될 수 있도록 189개 조약 가입국들의 노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카네기평화재단의 핵전문가인 존 울프달 연구원도 “비확산체제의 강화는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도 없고, 미국의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미국의 전향적인 자세 전환을 촉구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전 국방장관 등 미국의 전직 고위관리와 전문가 23명은 지난달 5일 비확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핵국과 비핵국 간의 ‘더 포괄적이고 균형잡힌 조약’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핵국과 비핵국 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린 상황에서 지난 6차 때 15년 만의 최종문서 합의과정에서 중재역할을 담당했던 남아공, 멕시코, 브라질, 이집트, 스웨덴, 뉴질랜드, 아일랜드 등 7개국의 ‘뉴아젠다동맹’같은 중도그룹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들 7개국 외무장관들은 최근 “비핵확산과 핵군축은 동전의 양면”이라며 “양자가 동일하게 정력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내놓았다. 이들 중도그룹에 독일, 캐나다, 네덜란드, 노르웨이, 터키, 벨기에, 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등 나토 8개국(나토-8) 그룹이 동조해 세를 넓히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한국 쪽 수석대표인 천영우 외교부 외교정책실장은 “핵 문제가 정치적인 의제인데다, 핵국과 비핵국 간의 인식의 차가 너무 커 합의가 어려울 수 있다”며 “비확산 체제의 개선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가 이뤄져 양 진영이 공감대가 이룰 수 있느냐가 이번 회의의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류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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