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폴란드 역사진상규명위원회 건물의 좁은 복도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회주의 체제 당시 정보기관과 경찰이 작성한 민간인 사찰 기록 가운데 자신과 관련된 서류를 들쳐보기 위해서다.
폴란드 일간 <제츠포스폴리타>의 브로니스와프 빌드스타인 기자가 사회주의 정권 시절에 정보기관의 정보원으로 활동한 24만여명의 명단을 폭로한 것은 지난 2월이지만, 지금도 명단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뜨겁다. 빌드스타인 기자는 폭로 다음날 바로 해고됐다.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이 명단은 하루 접속이 10만건을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빌드스타인 명단’에 포함된 자신의 파일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누가 감시해왔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빌드스타인 명단에 대해 폴란드 사회의 반응은 다소 혼란스럽다. 가면이 공개된 전 정보원들은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이 흔들리게 되는 위기를 맞아 좌불안석이다. 특히 과거 반체제 운동에 깊게 관여하면서 동지들을 감시했던 사람들은, 비밀 경찰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주변사람들과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 한 예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던 교황 최측근들의 이름이 알려져 폴란드 가톨릭교회도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정보기관에서 보관하고 있던 이들 자료의 상당수는 1990년 초 기관원들에 의해 이미 소각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이들 문서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정보기관들은 반체체 운동을 와해시키키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자료를 조작하기도 했다. 지난 25일 <제츠포스폴리타>는 폴란드 정보기관이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막기 위해 바웬사가 정보원이라는 내용의 조작된 문서들을 노벨상 위원회로 보냈다고 전직 고위 정보관리를 인용해 보도했다.
빌드스타인 명단은 사회주의 정권 붕괴 16년째를 맞은 폴란드 사회에 잊혀져가던 어두운 기억을 일깨움으로써 폴란드의 과거규명 작업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 90년대 초반 과거진상조사법 제정 이후 설립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는 과거 사회주의 정권시절의 협력자 색출뿐만 아니라 2차대전과 사회주의 정권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을 조사해 역사를 바로 잡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증거 수집 등의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빌드스타인 명단 폭로를 계기로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회주의 시절의 역사와 1989년부터 시작된 체제전환의 역사가 다시 쓰여질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폴란드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포즈난/임성호 통신원 sunislandsungh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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