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은 1989년 천안문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당시의 리루(맨 오른쪽). 오른쪽 사진은 왼쪽부터 데이비드 스콜 미드아메리칸에너지회장, 워런 버핏, 왕촨푸 비야디 회장과 함께 한 리루(맨 오른쪽). 월스트리트저널 누리집
인권단체 후원으로 미 대학서 펀드매니저 꿈 키워
BYD 투자 등으로 명성…버핏 “역발상 투자자” 찬사
BYD 투자 등으로 명성…버핏 “역발상 투자자” 찬사
1989년 6월, 리루는 세계를 뒤흔든 학생시위의 지도자로 천안문(톈안먼) 광장에 서 있었다.
21년 뒤, 그는 미국의 유명한 헤지펀드 매니저로 변신해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유력한 후계자 물망에 올라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30일 보도했다.
리루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전기자동차 개발로 유명한 중국 자동차 기업 비야디(BYD)에 투자하도록 다리를 놨고, 2008년 이후 비야디 주가가 6배 이상 오르면서 버크셔 해서웨이에 12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안겼다. 리루가 책임진 펀드는 1998년 이후 매년 평균 26.8%의 수익을 올렸다. 미국의 주요 기업 경영자들이 리루의 펀드에 자산을 맡기고 있다.
버핏 회장은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후계구도와 관련해 “리루는 중요한 점에서 (후계자) 조건에 맞다”며 “리루는 역발상을 하는 투자자이고 버크셔 해서웨이에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화려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리루는 거칠고 힘겨운 길을 걸어왔다. 그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1966년 중국 허베이성 탕산에서 태어났다. 생후 9달이 되었을 때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광산으로 끌려갔고 어머니는 노동수용소에 보내졌다. 부모는 그를 맡아줄 가족을 찾았고, 그는 ‘양부모’ 가족들을 전전하며 지냈다. 10살이 되었을 때 다시 가족과 재결합해 살게 됐지만, 그의 고향을 덮친 탕산대지진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난징대학 물리학과에서 공부하던 1989년 4월, 그는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개혁을 요구한 학생시위에 합류했다. 군대를 동원한 정부의 진압으로 광장이 피로 물든 뒤 그는 프랑스로 도망쳤다. 그는 인권운동가들의 초청을 받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갔고 그곳에서 장학금을 받아 경제와 법학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버핏의 강의를 들으며 금융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가 1997년 자신의 헤지펀드를 설립했을 때 월가는 호황을 맞고 있었고, 천안문 학생운동 지도자라는 그의 유명세 때문에 많은 고객이 몰렸다. 하지만 주로 아시아 기업들에 투자했던 그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19%의 손실을 기록하며 다시 좌절을 맛봤다.
2003년 그는 변호사 친구의 집에서 찰리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을 만났고 절친한 친구가 됐다. 멍거는 이후 리루의 펀드에 거액을 투자했다. 2002년 리루는 당시 중국의 신생 배터리 제조회사였던 비야디에 투자를 시작했고, 그의 소개로 2008년 버크셔 헤서웨이는 2억3000만달러를 투자해 비야디 주식의 10%를 사들였다.
리루는 첨단 기술을 가진 아시아 기업들에 집중 투자하는 전략을 활용한다. 비야디가 공언한 대로 전기자동차 양산에 성공할지는 리루가 1000억달러의 자산을 굴릴 버크셔 해서웨이의 투자 책임자가 될 지를 결정지을 핵심 변수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리루는 첨단 기술을 가진 아시아 기업들에 집중 투자하는 전략을 활용한다. 비야디가 공언한 대로 전기자동차 양산에 성공할지는 리루가 1000억달러의 자산을 굴릴 버크셔 해서웨이의 투자 책임자가 될 지를 결정지을 핵심 변수다. 베이징/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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