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가 한국인들을 웃고 울게 만든다면, 럭비는 뉴질랜드인을 미치게 만든다. 주요 럭비경기가 있는 날이면 거리까지 한적해지고 상가는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다. 한때 타우랑아 지역대표선수였던 쿠투(45)는 “럭비가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도 없다”면서 낡아버린 유니폼을 내보인다.
건설회사 인부인 피터(41)는 럭비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아무리 바쁘고 경제적인 부담이 되더라도 경기장을 찾는다. 럭비는 특히 마오리족에게 인기가 높다. 이는 아메리카 흑인이 농구를 선호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주로 동아프리카의 장신 흑인 출신이 엔비에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면 지구력과 돌파력이 좋은 마오리족은 럭비에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한다.
럭비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대형스크린이 완비된 에이제이(AJ) 바는 럭비광으로 넘친다. 주로 마오리들이 단골인 이 술집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로 커다란 맥주잔을 가득 채운 채 럭비경기를 관전한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서로 자기가 맥주를 사겠다며 빈 잔을 걷어가기 바쁘다. 마오리족의 이런 광경은 기질이 화끈한 한국인들을 연상시킨다.
럭비선수들 역시 대부분이 마오리족 출신들이다. 용맹성과 돌파력, 지구력과 순발력을 요구하는 럭비 경기에서 백인보다는 마오리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로 백인으로 구성된 오스트레일리아 팀과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응원 열기는 더 달아오른다.
같은 영연방 국가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뉴질랜드인은 서로 남모르게 경원하는 경향이 있다. 뉴질랜드인은 작은 물고기나 보잘것 없는 물건을 보면 ‘오지’(오스트레일리아를 경시하는 은어)라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뉴질랜드인을 ‘촌놈’으로 부른다. 그래서 두 나라 럭비 팀이 격돌하는 날이면 뉴질랜드 전체가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럭비 열풍이 몰아닥친다.
그러다 오스트레일리아 팀에게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상심해 상점마다 매출이 뚝 떨어지고, 단기간이지만 경기침체까지 불러올 정도다. 반대로 이기게 되면 그날 저녁은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로 변한다. 어디에서건 파티가 걸게 벌어진다. 남태평양의 외로운 섬 뉴질랜드야말로 ‘럭비에 죽고 사는’ 사람들의 나라다.
오클랜드/이영범 통신원 dlflr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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