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이른 아침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장벽의 관문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한바탕 소란이 빚어졌다. 베를린 시당국의 명령을 받은 시건설 용역직원들이 검문소 자리 근처에 세워진 1065개의 십자가들을 철거하려 하자 200여명의 철거 반대자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옛동독 정치범 출신의 일부 시위자들은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묶고 철거에 저항했다.
이 십자가들은 공식 추모시설은 아니다. 지난해말 찰리 검문소의 장벽박물관장인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45)가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목숨을 잃은 동독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박물관 옆 공터를 임대해 희생자의 사진, 이름 나이를 붙인 십자가를 전시해 놓은 임시 추모기념물이다. 스스로를 ‘장벽희생자들의 잔다르크’라고 부르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알렉산드라는 1962년 찰리포인트 옆에 베를린 장벽의 비극과 탈출 동독인들의 고통을 전시한 찰리포인트 기념관의 설립자 라이너 힐데브란트(1914~2004)의 부인이다.
이들 십자가군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찬반 논란의 대상이 돼왔다. 이 때문에 베를린의 잡지 <티프>는 지난해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를 ‘가장 골치아픈 베를린 시민’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임대기간이 만료되면서 땅 소유자인 은행이 낸 토지반환소송에서 베를린법원은 7월5일까지 철거하라는 판결을 내렸었다. 이 소송의 뒤에는 십자가 추모시설을 못마땅해 하는 시당국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은 독일인들은 이들 십자가가 ‘종교적 감정과잉’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는 철거작업을 “장벽희생자들을 두번 죽이는 행위”라며 “언젠가 토지를 사서, 십자가를 다시 세우겠다”고 밝혔다. 십자가들이 서있던 땅의 시가는 4300만달러. 힐데브란트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등 모금운동을 벌였지만 모금액은 턱없는 액수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에 찬 활동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베를린 시의회는 지난달 말 시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에 정식으로 장벽 희생자 추모시설을 설치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베를린시 문화부장관은 십자가가 철거된 곳에 냉전 시대를 조명하는 ‘냉전 박물관’을 세우고, 베르나우어 슈트라세에 있는 장벽 박물관과 추모시설을 2010년까지 증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juyeo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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