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로런스
피해 부모 끈질긴 증거수집
정부, 인종범죄 의혹 재조사
첨단기술로 0.5㎜ 혈흔 발견
백인 피의자 2명 ‘유죄’ 평결
정부, 인종범죄 의혹 재조사
첨단기술로 0.5㎜ 혈흔 발견
백인 피의자 2명 ‘유죄’ 평결
영국 역사상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종차별 살인사건’ 피의자들이 18년 만에 중형을 선고받았다. 끈질기게 이어진 희생자 부모들의 법정 투쟁과 지난한 세월이 이뤄낸 과학기술 발달의 승리였다.
영국 언론들은 1993년 4월22일 런던 남부 엘텀 버스정류장에서 18살 흑인 청년 스티븐 로런스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백인 피의자 5명 중 게리 돕슨(36)과 데이비드 노리스(35)에게 각각 15년2개월과 14년3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다고 4일 보도했다. 콜먼 트레이시 중앙형사법원 판사는 범죄가 인종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고, 범인들이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점을 중형 선고의 이유로 들었다.
앞서 3일 배심원들은 두명에게 유죄 평결을 내렸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부모들의 끈질긴 투쟁이 정의를 실현시켰다”고 논평했다. 사실이었다. 사건 당시 경찰은 5명의 용의자를 체포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풀어줬다. 또 경찰은 “그는 피부색이 검든 하얗든, 초록·파랑·노랑이든 상관없이 살해당한 것”이라며 인종범죄 가능성도 묵살했다고 <인디펜던트>는 전했다. 하지만 부모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용의자들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증거를 수집하는 등 사건을 포기하지 않았다.
논란이 커지자 영국 정부는 1997년 맥퍼슨위원회를 구성해 수사 과정 전반에 대한 재조사를 벌였다. 위원회는 이듬해 4월 보고서를 통해 “직업적인 무능함과 조직적인 인종차별주의의 합작품”이라고 경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사건 이후 영국 사회는 흑인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부인해왔던 ‘인종차별’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는 <가디언>의 평가처럼 로런스 사건이 영국 사회에 가져온 파장은 컸다. 정부의 수사 정책과 수사 결과에 불만이 있는 피해자들을 조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법원은 목격자 진술 등이 증거로 충분하지 않다며 로런스 사건 피의자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렇게 끝날 것만 같던 사건은 법의학 기술의 발달로 돌파구를 찾았다. 법의학자들은 고성능 현미경을 이용해 돕슨의 가죽재킷 섬유에서 0.25~0.5㎜ 크기의 혈흔을 찾아냈고, 유전자 감식을 통해 로런스의 것임을 확인했다. 또 노리스의 청바지에서 발견된 1㎜와 2㎜짜리 머리카락도 미국의 최신 감식 기술을 통해 로런스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새로운 법의학적 증거가 발견되면서 지난해 5월 재판이 재개됐다. 그리고 배심원들은 18년 전 감식 기술 부족으로 찾아내지 못했던 새로운 증거를 바탕으로 유죄를 평결했다. 아버지 네빌은 “5~6명의 가담자 모두 정의 앞에 설 때까지 편히 쉴 수 없을 것”이라며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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