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25일 영국의 스타 방송인 고 지미 새빌이 한 시상식장에서 메달을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팝 디제이’ 지미 새빌 작년 사망뒤
‘수십년간 아동성폭행’ 의혹 쏟아져
시사프로그램서 상세히 취재했지만
간부들이 “자료 불충분” 보도 막아
결국 다른 방송사 보도로 ‘공론화’
영국하원, 현 사장에 출석 명령
‘수십년간 아동성폭행’ 의혹 쏟아져
시사프로그램서 상세히 취재했지만
간부들이 “자료 불충분” 보도 막아
결국 다른 방송사 보도로 ‘공론화’
영국하원, 현 사장에 출석 명령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가 이미 고인이 된 스타 방송인 지미 새빌(1926~2011)의 아동 성폭행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다. 새빌 사건을 덮은 간판 시사프로그램 ‘뉴스나이트’의 책임자 피터 리펀이 22일(현지시각) 해임됐지만, 공영방송의 윤리를 저버린 비비시에 대한 비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숨진 팝 디제이 새빌은 1960년대부터 반세기 가까이 비비시와 함께했다. ‘지밀 픽스 잇’(Jim’ll Fix it), ‘톱 오브 더 팝스’(Top of the pops)가 장수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던 건 새빌 덕이었다. 그는 영국 대표 방송의 간판 진행자로, 4000만파운드(약 700억원) 이상을 모금한 기부천사로 명망을 떨쳤다. 문화·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1년 대영제국훈장을 받았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은 1996년 새빌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새빌의 소아애호증과 아동 성폭행 의혹은 오랜 시간 풍문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2007년 서리주 수사당국은 1970년대 벌어진 새빌의 아동 성폭행 사건을 조사하고서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2008년에도 서식스 경찰이 1970년 성범죄 사건을 수사했지만, 피해자가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수사당국의 무능함이 생전에 새빌에게 면죄부를 주기는 했지만, ‘성(Saint) 새빌’의 ‘데블’(악마) 같은 두 얼굴을 덮어준 일등공신은 비비시다. 실제로 비비시의 ‘뉴스나이트’ 팀은 지난해 10월 말 새빌이 숨진 뒤 아동 성폭행 사건을 취재했다. 그러나 책임자인 리펀은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며 더이상의 취재와 보도를 막았다. 취재기자가 “자료는 충분하며, 방송하지 않으면 비비시의 명성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고 항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대신 비비시는 새빌 추모 방송 세편을 내보냈다.
이 사건이 공론화된 것도 3일 민영방송 <아이티브이>(ITV)가 다큐멘터리 ‘새빌의 다른 면’을 방송하면서부터다. 몇몇 소녀들이 비비시의 드레스룸에서 새빌 일행에게 성폭행·성추행을 당했다고 증언했는데, 방송 뒤 전국에서 피해자들의 신고와 제보가 빗발쳤다. 영국 런던 경찰국은 재수사 결과 1959년부터 2006년까지 200명 이상의 소녀가 피해를 당했다고 발표했다. 피해자 중에는 소년 2명도 있다. 사건의 면면은 숫자보다 더욱 추악하다. 새빌은 1970년대 병원 기부금 모금 행사에서 환자였던 17살 소녀를 성폭행했다. 1971년에는 고아원에서 11살, 9살 자매를 성적으로 학대했다.
피해자들 증언과 경찰 수사 내용이 공개되면서, 비비시가 세계적인 공영방송으로서 쌓아온 신뢰와 도덕성도 새빌과 함께 무덤에 파묻힐 처지가 됐다. 비비시의 부인에도 새빌이 50년간 저질러온 범죄를 세계 최고의 취재력을 자랑하는 방송사가 몰랐다고 믿는 영국인은 별로 없다. 특히 리펀은 지난 2일 자사 블로그를 통해 “새빌 의혹을 방송하지 않은 것은 편성상 이유였으며, 경찰 수사보다 새로운 점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후 일부 취재 내용은 경찰도 몰랐던 새로운 혐의라는 것이 확인됐다. 비비시는 결국 “리펀의 해명이 부정확하고 불완전하다”며 해임을 결정했다. 그러나 의혹의 화살은 당시 비비시 사장이었다가 올해 미국 <뉴욕 타임스> 사장으로 내정된 마크 톰슨과 현 비비시 사장 조지 엔트위슬에게 향하고 있다. 비비시는 외부 전문가를 동원해 자체 조사에 나섰지만, 엔트위슬 사장은 23일 하원까지 불려나왔다.
비비시는 2003년에도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이라크전과 관련된 정부 보고서가 이라크의 군사능력을 과장했다고 보도했다가 발설자로 지목된 취재원이 자살하며 큰 고비를 넘긴 적이 있는데, 이번 사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뉴욕 타임스>는 비비시의 베테랑 특파원 존 심슨을 인용해 “비비시가 수십년 만에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전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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