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1980년 장칭, 2013년 보시라이
▶ 17개월 만에 나타난 보시라이를 보니 은근히 반가웠다. 베이징 특파원 시절 그는 항상 버거운 상대였다. 그의 비전과 정책, 인기, 그리고 극적인 몰락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걸 제대로 풀어낸다면 장막 뒤에 숨겨진 중국 정치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느끼곤 했다. 이제 초라한 죄수가 되어 다시 나타난 보시라이의 일거수일투족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와 중국 지도부가 재판 곳곳에 숨겨 놓은 암호들을 이번에 풀 수 있으려나?
“나는 마오 주석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누구든 물었다. 너희가 나를 체포하고 재판하는 것은 마오 주석을 모욕하는 것이고, 전 인민을 모욕하는 것이며, 전 인민이 참여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모욕하는 것이다!”
1980년 11월 수억명의 중국인들이 직장과 학교의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화면 속에선 문화대혁명을 주도해 수십만명을 박해한 반혁명·모반죄로 기소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재판장과 증인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호통을 쳐댔다. 기소장은 전부 ‘헛소리’라며 변론문 ‘나의 관점’을 2시간 넘게 읽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된 상태에서 1991년 자살했다.
그로부터 33년이 흐른 지난 22~26일, 중국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또 한번의 법정 드라마가 펼쳐졌다. ‘중국 좌파의 영웅’이자 많은 이들에겐 ‘제2의 마오쩌둥’이었던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가 뇌물수수와 공금횡령, 직권남용 혐의로 피고인석에 앉았다.
장칭 “헛소리 마라”, 보시라이 “아내는 미쳤다”
장칭처럼 그도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뇌물을 받은 적도 없고, 아내와 아들이 기업가들한테서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은 알지 못했으며, 아내의 살인죄를 은폐하려 한 적도 없다고 했다. 뇌물을 줬다고 증언한 기업가에겐 “미친 개가 거짓말을 한다”고 쏘아붙였다. 아내 구카이라이가 자신의 뇌물수수를 증언하는 영상이 나오자 “아내는 미쳤다” “가소로운 증언”이라고 했다. 오랜 심복이었으나 배신하고 미국영사관으로 도주해 자신이 몰락하는 빌미를 제공한 왕리쥔 전 충칭시 공안국장이 증인석에 나오자 “사악한 두 얼굴의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배우 출신 장칭과 언론학을 전공한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의 달인 보시라이는 천하를 호령하다 몰락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닮았다. 좀더 깊숙이 들여다본다면, 두 재판은 중국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다른 시대를 준비하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세기의 재판’이다. 보시라이의 재판에 ‘문혁 4인방(장칭을 비롯한 문혁의 주역) 재판 이후 최고의 정치재판’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이 빈말은 아니다.
문화대혁명 혼란의 책임은
당도 마오쩌둥도 아닌
장칭과 4인방이 뒤집어썼다
그 뒤 덩샤오핑이 구상한
개혁개방의 새 시대가 찾아왔다 초고속 경제성장 달성했지만
부정부패·빈부격차 심화됐고
시진핑 등 지도부는 보시라이를
부정부패 척결 본보기로 세웠다
이번에도 당의 반성은 없었다 장칭의 재판은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1976)의 혼란과 폐허를 마무리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했던 통과의례였다. 우선 4인방과 덩샤오핑의 권력 투쟁에서 덩샤오핑의 최종적인 승리를 선언하는 자리였다. 장칭 등 4인방은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에도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군부의 지지를 받은 덩샤오핑에 의해 체포돼 법정으로 끌려나왔다. 덩샤오핑과 새 지도부는 공산당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마오쩌둥 대신, 장칭과 4인방에게 문혁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문혁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문혁의 책임에서 당을 구했다. 이 재판은 마오쩌둥의 시대가 가고, 덩샤오핑이 구상한 ‘공산당 통치하의 시장화 혁명’의 시대를 알렸다. 하지만 문혁에서 당이 저지른 과오, 즉 처음에는 홍위병 등 군중을 동원하고 이후에는 군을 앞세워 국민을 진압했던 당의 절대권력으로 인한 문제들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정부와 사회를 철저히 통제하는 정치시스템을 유지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요소를 전면 도입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 길의 끝은 해피엔딩이었을까? 보시라이의 재판은 그에 대한 복잡한 대답을 담고 있다. 30여년이 흘러 또다른 갈림길에 서게 된 중국을 상징한다. 덩샤오핑의 시장화 노선을 따라 ‘부자가 되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중국은 한계에 부딪혔다. 특권층의 막대한 부, 저임금 노동력과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통해 이룬 초고속 성장 뒤에선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와 소외계층의 불만이 임계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다. 젊은 노동인구의 감소세와 글로벌 시장 상황의 변화로 더이상 수출에만 의존할 수도 없다. 중국은 새로운 성장모델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생방송된 장칭 재판·트위터 중계된 보시라이 재판 보시라이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민심의 요구를 포착하였다. 2007년부터 중국 서남부의 대도시 충칭의 당서기를 맡은 보시라이는 ‘충칭모델’로 불리게 되는 경제·사회 정책을 추진했다. 국유기업의 역할을 강화해 여기서 나오는 수익을 활용해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를 확대하는 정책이었다. 가령 농촌 주민들에게 도시 후커우(호구)를 줘 복지를 확대하고 서민·노동자들을 위해 저렴한 주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들은 보시라이가 마오쩌둥 시절을 연상케 하는 정치 캠페인을 벌이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주민들을 모아 혁명가요 부르기 행사를 열고, 관리와 학생들을 농촌으로 보내 그곳의 삶을 체험하게 했다. 또한 범죄조직,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관리, 기업가들을 처단하는 범죄와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붉은 노래 부르기와 검은 세력 소탕’(唱紅打黑) 정책이다. 이런 정책들은 빈부격차와 지나친 시장화의 부작용에 환멸을 느낀 서민과 좌파들에게 희망으로 보였다. 보시라이는 부패한 관리들을 혼내주고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 ‘제2의 마오쩌둥’이자 ‘영웅’이란 이미지를 만들어낸 정치 캠페인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최고 지도부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던 그가 지난해 3월 돌연 충칭 당서기직을 박탈당하고 구금되었다. 자유주의 개혁파들은 보시라이의 절대 권력 아래 진행된 범죄와의 전쟁이, 실은 민영기업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감금과 고문도 서슴지 않은 인권 침해 범죄였다고 지적한다. 중국 혁명원로였던 보이보 부총리의 아들로 ‘태자당의 황태자’였던 보시라이가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펴며 많은 위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를 엄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특히 마오쩌둥의 유산을 되살려낸 보시라이의 행보가 중국을 문화대혁명과 같은 상황으로 끌고 갈 위험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많은 좌파 지지자들과 서민들은 보시라이의 정책은 시장화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것이었으나, 당내 권력층이 보시라이의 영향력을 위협으로 느껴 숙청했다고 여기며 보시라이를 동정한다. 이렇게 중국 좌우파의 노선투쟁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보시라이를 심판대에 올리는 것은 시진핑 지도부에게도 골치 아픈 난제였다. 지도부는 부정부패 척결의 상징적 사례로 보시라이 처벌의 정당성을 과시하면서, 당의 기강을 잡고 위신을 회복하는 무대를 펼치려 했다. 보시라이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는 중국 지도부가 그리고 있는 새로운 ‘중국 모델’에 대한 청사진도 암시하게 된다. 반면 보시라이에겐 이번이 세상을 향해 자기 주장을 펼칠 ‘마지막 무대’였다. 중국 지도부는 고심 끝에 ‘트위터(웨이보) 중계 재판’이라는 기발한 형식을 선보였다. 중국 당국이 선발한 19명의 취재진과 보시라이의 가족 5명 등 110여명에게만 방청이 허용됐다. 텔레비전 중계는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보시라이 발언을 검열해 당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웨이보를 통해 상세히 문자로 중계했다. 여전히 만만치 않은 지지층을 거느린 보시라이가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당내 민감한 사정을 폭로할 위험 등을 고려한 것이다. 33년 전 장칭의 재판을 330명의 취재진을 비롯한 방청객 900명이 지켜보고 텔레비전으로 생방송까지 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장칭은 당시 전 국민의 공적이었고, 전체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 덩샤오핑 지도부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중국 당국의 사전각본에도 불구하고, 보시라이는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일부 검열은 있었으나 그의 발언은 비교적 상세하게 공개됐다. 왜 당은 보시라이의 반격을 허용했을까? 비공개로 하루 이틀 만에 심문을 끝내고 유죄 판결을 내린다면, 그의 지지자들은 반발할 것이고 보시라이가 억울한 희생양이라는 의혹은 계속 남을 것이다. 보시라이 개인은 이미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그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죽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시진핑으로선 감옥에 갇힌 호랑이 보시라이와 여전히 노선 투쟁과 영향력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보시라이가 몰락하기 전 시진핑을 제거하고 최고 지도자가 될 야망을 품었다는 소문도 무성했지만(정치국 상무위원이던 저우융캉과 함께 쿠데타를 구상했다는 설까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보시라이는 자신의 정치모델을 뚜렷이 제시함으로써 시진핑의 정치적 라이벌로 남았다. 당의 그늘과 권력투쟁은 철저히 가려져 하지만 보시라이의 현란한 법정 쇼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규칙’의 경계선도 분명했다. 당의 어두운 면이나 권력투쟁의 내막을 드러내는 발언은 한마디도 공개되지 않았다. 보시라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오히려 철저히 가려졌다. 당국이 기소한 혐의는 보시라이가 오래전 랴오닝성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은 기업가들로부터의 뇌물수수, 왕리쥔 망명, 아내의 살인 사건을 둘러싼 직권남용에 국한됐다. 가장 민감한 부분인 충칭모델의 공과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들은 당의 과오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감춰졌다.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직을 박탈당하기 전날,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기자회견을 통해 보시라이의 반성을 촉구하면서 “문혁과 같은 비극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해야 했던 권력투쟁의 내막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보시라이도 지도부도 당의 통치,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내용은 모두 감췄다. 모든 것은 보시라이와 주변 인물들의 사생활 문제로 몰아갔다. 문혁의 근본적인 문제들, 즉 당의 권력을 감시할 법적 장치나 인민들의 권리가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비극을 반성하지 않고 넘어간 문혁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당내 좌우파와 민심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찾아 보시라이를 처리해 버리려 한다. 11월에 18기 3중전회(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열어 시진핑 체제 첫 5년의 청사진을 내놔야 하는 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쁘고 복잡할 것이다.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선포한 것처럼, 이번엔 시진핑-리커창 지도부가 향후 30년 동안 중국이 걸어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중국의 미래를 결정할 이 청사진을 둘러싸고, 당내 노선투쟁은 격렬하다. 리커창 총리는 민영기업의 역할 확대, 과감한 금융산업 개방 등을 담은 경제개혁 구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당·정부의 과도한 통제, 국유기업 중심 이익집단의 자원 독점을 완화하고 민간의 자율적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개혁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올해 초 <남방주말> 기자들이 헌정민주를 주장하면서 당의 검열에 저항했던 사태나 최근 문혁 시기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잇따라 공개 반성에 나서는 것은 이런 목소리를 담고 있다. 반면 좌파 진영과 보수세력은 이런 방향의 개혁이 경제·사회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약화시켜 결국 당의 통치를 위태롭게 할 거라는 위기감을 드러낸다. 최근 관영매체와 당의 문건들이 앞다퉈 서구식 입헌민주주의 비판에 나서는 것은 이를 대변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이런 와중에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듯 보인다. 그는 개혁개방 심화와 새 성장모델을 만들어낼 경제개혁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오쩌둥식 군중노선과 단결, 통제를 외친다. 그는 마오쩌둥의 유산과 덩샤오핑의 유산을 모두 손에 쥐려 한다.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지지를 확보해 권력기반과 당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권력을 강화한 뒤 정치적 통제시스템을 수술하고 민간의 에너지에 힘을 실어줄 개혁의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30년 넘은 덩샤오핑 모델을 약간 수정해 경제개혁은 심화하되 정치 통제의 고삐는 더 단단히 쥐는 쪽으로 갈 것인가? 그 단서를 찾기 위해 지켜본 보시라이 재판에선 아쉽게도 개혁과 반성보단 통제의 그림자가 짙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위 사진)도 1980년 11월 베이징 법정에 섰다. 그의 혐의는 반혁명·모반죄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도 마오쩌둥도 아닌
장칭과 4인방이 뒤집어썼다
그 뒤 덩샤오핑이 구상한
개혁개방의 새 시대가 찾아왔다 초고속 경제성장 달성했지만
부정부패·빈부격차 심화됐고
시진핑 등 지도부는 보시라이를
부정부패 척결 본보기로 세웠다
이번에도 당의 반성은 없었다 장칭의 재판은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1976)의 혼란과 폐허를 마무리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했던 통과의례였다. 우선 4인방과 덩샤오핑의 권력 투쟁에서 덩샤오핑의 최종적인 승리를 선언하는 자리였다. 장칭 등 4인방은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에도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 군부의 지지를 받은 덩샤오핑에 의해 체포돼 법정으로 끌려나왔다. 덩샤오핑과 새 지도부는 공산당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마오쩌둥 대신, 장칭과 4인방에게 문혁의 책임을 뒤집어씌워 문혁을 마무리하는 동시에 문혁의 책임에서 당을 구했다. 이 재판은 마오쩌둥의 시대가 가고, 덩샤오핑이 구상한 ‘공산당 통치하의 시장화 혁명’의 시대를 알렸다. 하지만 문혁에서 당이 저지른 과오, 즉 처음에는 홍위병 등 군중을 동원하고 이후에는 군을 앞세워 국민을 진압했던 당의 절대권력으로 인한 문제들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그리하여, 공산당이 정부와 사회를 철저히 통제하는 정치시스템을 유지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요소를 전면 도입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 길의 끝은 해피엔딩이었을까? 보시라이의 재판은 그에 대한 복잡한 대답을 담고 있다. 30여년이 흘러 또다른 갈림길에 서게 된 중국을 상징한다. 덩샤오핑의 시장화 노선을 따라 ‘부자가 되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중국은 한계에 부딪혔다. 특권층의 막대한 부, 저임금 노동력과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통해 이룬 초고속 성장 뒤에선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와 소외계층의 불만이 임계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다. 젊은 노동인구의 감소세와 글로벌 시장 상황의 변화로 더이상 수출에만 의존할 수도 없다. 중국은 새로운 성장모델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해법은 어디에 있는가? 생방송된 장칭 재판·트위터 중계된 보시라이 재판 보시라이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민심의 요구를 포착하였다. 2007년부터 중국 서남부의 대도시 충칭의 당서기를 맡은 보시라이는 ‘충칭모델’로 불리게 되는 경제·사회 정책을 추진했다. 국유기업의 역할을 강화해 여기서 나오는 수익을 활용해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를 확대하는 정책이었다. 가령 농촌 주민들에게 도시 후커우(호구)를 줘 복지를 확대하고 서민·노동자들을 위해 저렴한 주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들은 보시라이가 마오쩌둥 시절을 연상케 하는 정치 캠페인을 벌이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주민들을 모아 혁명가요 부르기 행사를 열고, 관리와 학생들을 농촌으로 보내 그곳의 삶을 체험하게 했다. 또한 범죄조직,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관리, 기업가들을 처단하는 범죄와의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붉은 노래 부르기와 검은 세력 소탕’(唱紅打黑) 정책이다. 이런 정책들은 빈부격차와 지나친 시장화의 부작용에 환멸을 느낀 서민과 좌파들에게 희망으로 보였다. 보시라이는 부패한 관리들을 혼내주고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펼 ‘제2의 마오쩌둥’이자 ‘영웅’이란 이미지를 만들어낸 정치 캠페인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며 최고 지도부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던 그가 지난해 3월 돌연 충칭 당서기직을 박탈당하고 구금되었다. 자유주의 개혁파들은 보시라이의 절대 권력 아래 진행된 범죄와의 전쟁이, 실은 민영기업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감금과 고문도 서슴지 않은 인권 침해 범죄였다고 지적한다. 중국 혁명원로였던 보이보 부총리의 아들로 ‘태자당의 황태자’였던 보시라이가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무리한 정책을 펴며 많은 위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를 엄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특히 마오쩌둥의 유산을 되살려낸 보시라이의 행보가 중국을 문화대혁명과 같은 상황으로 끌고 갈 위험이 있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많은 좌파 지지자들과 서민들은 보시라이의 정책은 시장화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것이었으나, 당내 권력층이 보시라이의 영향력을 위협으로 느껴 숙청했다고 여기며 보시라이를 동정한다. 이렇게 중국 좌우파의 노선투쟁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보시라이를 심판대에 올리는 것은 시진핑 지도부에게도 골치 아픈 난제였다. 지도부는 부정부패 척결의 상징적 사례로 보시라이 처벌의 정당성을 과시하면서, 당의 기강을 잡고 위신을 회복하는 무대를 펼치려 했다. 보시라이에게 어떤 처벌을 내릴지는 중국 지도부가 그리고 있는 새로운 ‘중국 모델’에 대한 청사진도 암시하게 된다. 반면 보시라이에겐 이번이 세상을 향해 자기 주장을 펼칠 ‘마지막 무대’였다. 중국 지도부는 고심 끝에 ‘트위터(웨이보) 중계 재판’이라는 기발한 형식을 선보였다. 중국 당국이 선발한 19명의 취재진과 보시라이의 가족 5명 등 110여명에게만 방청이 허용됐다. 텔레비전 중계는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보시라이 발언을 검열해 당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웨이보를 통해 상세히 문자로 중계했다. 여전히 만만치 않은 지지층을 거느린 보시라이가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당내 민감한 사정을 폭로할 위험 등을 고려한 것이다. 33년 전 장칭의 재판을 330명의 취재진을 비롯한 방청객 900명이 지켜보고 텔레비전으로 생방송까지 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장칭은 당시 전 국민의 공적이었고, 전체 과정을 공개하는 것이 덩샤오핑 지도부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개혁개방 노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중국 당국의 사전각본에도 불구하고, 보시라이는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일부 검열은 있었으나 그의 발언은 비교적 상세하게 공개됐다. 왜 당은 보시라이의 반격을 허용했을까? 비공개로 하루 이틀 만에 심문을 끝내고 유죄 판결을 내린다면, 그의 지지자들은 반발할 것이고 보시라이가 억울한 희생양이라는 의혹은 계속 남을 것이다. 보시라이 개인은 이미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그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죽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시진핑으로선 감옥에 갇힌 호랑이 보시라이와 여전히 노선 투쟁과 영향력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보시라이가 몰락하기 전 시진핑을 제거하고 최고 지도자가 될 야망을 품었다는 소문도 무성했지만(정치국 상무위원이던 저우융캉과 함께 쿠데타를 구상했다는 설까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보시라이는 자신의 정치모델을 뚜렷이 제시함으로써 시진핑의 정치적 라이벌로 남았다. 당의 그늘과 권력투쟁은 철저히 가려져 하지만 보시라이의 현란한 법정 쇼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규칙’의 경계선도 분명했다. 당의 어두운 면이나 권력투쟁의 내막을 드러내는 발언은 한마디도 공개되지 않았다. 보시라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오히려 철저히 가려졌다. 당국이 기소한 혐의는 보시라이가 오래전 랴오닝성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은 기업가들로부터의 뇌물수수, 왕리쥔 망명, 아내의 살인 사건을 둘러싼 직권남용에 국한됐다. 가장 민감한 부분인 충칭모델의 공과를 둘러싼 정치적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침해들은 당의 과오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감춰졌다.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직을 박탈당하기 전날, 원자바오 당시 총리가 기자회견을 통해 보시라이의 반성을 촉구하면서 “문혁과 같은 비극이 다시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해야 했던 권력투쟁의 내막도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보시라이도 지도부도 당의 통치,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내용은 모두 감췄다. 모든 것은 보시라이와 주변 인물들의 사생활 문제로 몰아갔다. 문혁의 근본적인 문제들, 즉 당의 권력을 감시할 법적 장치나 인민들의 권리가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비극을 반성하지 않고 넘어간 문혁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당내 좌우파와 민심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찾아 보시라이를 처리해 버리려 한다. 11월에 18기 3중전회(18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열어 시진핑 체제 첫 5년의 청사진을 내놔야 하는 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쁘고 복잡할 것이다.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선포한 것처럼, 이번엔 시진핑-리커창 지도부가 향후 30년 동안 중국이 걸어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중국의 미래를 결정할 이 청사진을 둘러싸고, 당내 노선투쟁은 격렬하다. 리커창 총리는 민영기업의 역할 확대, 과감한 금융산업 개방 등을 담은 경제개혁 구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당·정부의 과도한 통제, 국유기업 중심 이익집단의 자원 독점을 완화하고 민간의 자율적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개혁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올해 초 <남방주말> 기자들이 헌정민주를 주장하면서 당의 검열에 저항했던 사태나 최근 문혁 시기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잇따라 공개 반성에 나서는 것은 이런 목소리를 담고 있다. 반면 좌파 진영과 보수세력은 이런 방향의 개혁이 경제·사회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약화시켜 결국 당의 통치를 위태롭게 할 거라는 위기감을 드러낸다. 최근 관영매체와 당의 문건들이 앞다퉈 서구식 입헌민주주의 비판에 나서는 것은 이를 대변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이런 와중에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듯 보인다. 그는 개혁개방 심화와 새 성장모델을 만들어낼 경제개혁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오쩌둥식 군중노선과 단결, 통제를 외친다. 그는 마오쩌둥의 유산과 덩샤오핑의 유산을 모두 손에 쥐려 한다.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지지를 확보해 권력기반과 당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권력을 강화한 뒤 정치적 통제시스템을 수술하고 민간의 에너지에 힘을 실어줄 개혁의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30년 넘은 덩샤오핑 모델을 약간 수정해 경제개혁은 심화하되 정치 통제의 고삐는 더 단단히 쥐는 쪽으로 갈 것인가? 그 단서를 찾기 위해 지켜본 보시라이 재판에선 아쉽게도 개혁과 반성보단 통제의 그림자가 짙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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