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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가해자·피해자 어울려 과거사를 넘다

등록 2013-12-06 20:17수정 2013-12-06 21:31

[토요판] 커버스토리|만델라가 남긴 것
부끄러운 과거 외면하지 않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 만들어
반인권적 폭력 명백하게 밝혀
5년동안 스스로 사면 신청하며
과거사 고백한 이가 7000여명

여러 정당·시민단체 참여
2년여에 걸친 토론 끝에
1000여쪽 달하는 민주헌법 제정
‘건국 아버지’ 마지막 선택은
독재자의 길 아닌 정계 은퇴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로이터>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평가했다. 그의 족적은 문명사적이다.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을 성취했다. 만델라 이후 인류는 증오의 과거를 화해로 포용하는 법을 알게 됐고, 현대적 권리장전의 모범을 갖게 됐으며, 독재의 유혹을 떨치고 고요한 삶으로 물러서는 용기를 이해하게 됐다.

남아공 사상 첫 민주선거를 통해 1994년 출범한 만델라 정부는 흑인과 백인을 하나로 묶는 과업을 서둘렀다. 1995년 11월 출범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그 핵심이었다.

대다수 현대국가들은 차별·탄압·독재 등의 ‘부끄러운 과거사’ 문제를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가해자·피해자가 함께 어울려 국가적으로 극복한 경우는 거의 없다. 남아공의 진실화해위는 유일무이한 예외이자 그 모범이다.

진실화해위는 수사권·소환권을 포함해 독립적이면서도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개인·정당·언론·기업은 물론 국가기관까지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만델라는 진실화해위에 ‘강력한 권능’을 부여했다.

막강한 권능은 처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진실화해위의 수사와 소환은 사실 자체를 명백하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데 맞춰졌다. 반인권적 폭력의 원인·성격·정도 등을 정확히 밝히고, 폭력을 행사한 이들의 동기·관점 등을 함께 규명했다.

이를 구현하는 과정도 민주적이었다. 진실화해위원들은 몇 단계의 공개적 과정을 거쳐 임명됐다. 조사 활동의 절정은 가해자·피해자 등이 함께 출석한 청문회였는데, 이 장면은 영어·아프리칸스어는 물론 9개 종족 언어로 번역돼 전국에 생방송됐다.

‘진실을 고해하면 보복하지 않는다’고 공약한 만델라를 가해자들은 신뢰했다. 진실화해위 출범 이후 5년 동안 스스로 사면을 신청하며 과거사를 고백한 이는 7000여명에 이르렀다. 남아공의 과거사 청산을 연구해온 김영수 경상대 사회과학원 교수는 “진실만이 용서·화해로 가는 지름길이고, 야만적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철학이 있었기에 반세기에 걸친 차별의 청산이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1994년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만델라는 말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존엄을 가지고 사는 ‘무지개 나라’(Rainbow Nation)를 건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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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말로 그치지 않았다. 헌법에 기록됐다. 흑백 공동의 민주선거를 치르기로 한 뒤, 남아공은 국가적 논의에 들어갔다. 흑인을 대표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백인을 대표하는 국민당을 비롯해 여러 정당과 시민단체가 참여해 2년여에 걸쳐 집중적인 토론·연구를 거듭했다. 헌법 제정 과정 자체가 참여·숙의 민주주의의 전형이었다.

1996년 만들어진 헌법 전문의 첫 문장은 이렇다. “우리, 남아프리카의 인민은 과거의 부정의를 인식하고, 정의와 자유를 갈망한 이들을 기리며, 우리의 나라를 건설하고 발전시킨 이들을 존중하며, 우리가 자유롭게 선출한 대표자들을 통해 이 헌법을 공화국의 최고 법으로 채택한다.” 불행했던 과거사를 명백히 밝히되, 백인들이 주도한 개발의 시대와 흑인들이 이끈 자유 투쟁을 함께 끌어안겠다는 정신이 오롯하다.

한국 헌법이 200자 원고지 100여장 분량인 데 비해, 남아공 헌법은 모두 1000여장 분량이다. 특히 100여장 분량을 ‘권리장전’으로 채웠다. “평등은 모든 권리와 자유에 대한 완전하고 동등한 향유를 포함한다. (중략) 국가는 인종, 사회적 성, 생물학적 성, 임신 및 혼인 여부, 사회적 출신, 피부색, 성적 취향, 나이, 장애, 종교, 양심, 믿음, 문화, 언어 그리고 출생 등을 이유로 누구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헌법 조문의 주어는 ‘여성과 남성’(women and men)의 순서로 적었다. 어린이의 권리도 따로 밝혀 적었다. ‘정의로운 경제’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미래 개념도 권리 조항에 끌어들였다. “모든 사람은 정의로운 경제와 사회발전을 위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 및 자연자원의 사용을 보증받는다.”

국가의 존재 이유도 분명히 밝혔다. “정부와 국가의 모든 기관은 공화국 인민의 좋은 삶(웰빙)을 공고히 하며, 헌법과 공화국과 그 인민에게 충성한다.” 그 선언은 문장으로 아름답고 뜻으로 고귀하다.

남아공은 스위스·독일과 함께 ‘헌법 선진국’으로 평가받는다. 헌법학을 전공한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세 나라의 헌법을 “첨단 헌법”이라고 표현한다. 문명국가의 가치를 밝혀 적은 최고의 글이 헌법이라면, 만델라는 인류의 지혜를 모은 최고의 헌법을 우리에게 남겼다.

흑인들을 탄압·착취한 백인 정권 치하의 남아공은 현대적 의미의 ‘정상 국가’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만델라는 오늘날의 남아공을 기초한 ‘건국의 아버지’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건국을 주도한 초대 대통령은 극심한 논란의 대상이 된다. 건국의 공로가 있지만, 오랫동안 독재자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만델라는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 무한하고도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준비가 돼 있는 막강한 추종세력이 있었지만,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곧바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후 요하네스버그 교외의 자택과 고향 쿠누 마을을 오가며 지냈다.

그가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0년 7월이었다.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요하네스버그 스타디움에 만델라가 등장했다. 세계인들이 그를 보고 환호했다. 만델라는 모자를 벗어 흔들며 미소로 인사했다.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라는 애칭에 어울리는 편안하고 푸근한 웃음이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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