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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살인, 그것은 가장 효과적인 언론 통제

등록 2013-12-20 19:25수정 2013-12-22 13:29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⑬ ‘전선 기자’의 죽음
“요즘은 하와이 안 가네?”

“아, 예, 미얀마 쪽 일 보느라….”

핑계지만, 장기 취재가 걸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통에 한동안 전화를 못 드리다 며칠 전 어머니와 통화했다. 근데 나는 하와이란 데를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1980년대 말부터 전쟁 취재를 떠날 때면 늘 하와이니 스위스 간다며 거짓말을 해온 게 그렇게 됐다. 물론 내 기사나 방송을 챙겨 보시는 어머니가 속을 리 없었지만. 다행히 어머니가 미얀마 북부 카친 전선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무튼 우리 둘 사이에 그 하와이는 전쟁터를 뜻하는 암호 같은 것이었다.

“밥 잘 챙겨 먹고, 건강 조심하고. 근데, 요새 시리아가 위험하다더라.”

내가 시리아 취재를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에둘러 드러낸 어머니 말마따나 올 한해 시리아에서만 20여명에 이르는 기자가 목숨을 잃었다.

프레스 표시 헬멧과 방탄조끼로 무장한 이유

그러고 보니 벌써 또 한해가 저문다. 올해도 수많은 언론노동자들이 전쟁터를 비롯한 취재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웬만해선 내 몸이 담긴 이야기를 꺼렸지만 최근 기자들의 희생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인권 차원으로 다뤄야 할 만큼 심각해진 현실 탓에 오늘 화두로 잡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동안 전쟁터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마당에 기자라고 달리 안전할 수도 없다고만 여겼다. 함께 현장을 뛰었던 동료들의 희생이 억울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차례쯤이나 팔자라 믿으면서, 한편으론 역사가 팽팽 돌아가는 현장을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특혜를 누린 만큼 다음 차례가 나여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왔다. 게다가 현장에서 일하다 목숨 잃는 게 어디 전선기자들뿐이던가. 온갖 열악한 노동현장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온 현실도 내겐 어설픈 위안거리였다.

그사이 기자들이 전쟁터에서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잠깐 살펴보자. 기록상 최초로 민간인이 전쟁을 취재한 게 크림전쟁(1853~1856년) 때였다고 하니 전쟁보도 역사도 이제 160년을 맞았다. 그동안 크고 작은 전쟁과 분쟁에서 얼마나 많은 전선기자들이 죽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4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 68명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17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시절은 전쟁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현대적 의미의 전선기자라기보다 군대를 따라다니며 아군(자국)의 승전보를 전하는 전령사들인 말 그대로 ‘종군기자’들 판이었다. 그러다 베트남전쟁에서 처음으로 아군의 만행과 자국의 패전 가능성을 보도해 세계적인 반전운동 기폭제 노릇을 했던 전선기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실질적인 전선기자 자료도 그 베트남전쟁에서부터 넘어온 셈이다. 베트남전쟁(제2차 인도차이나전쟁·1955~1975년) 20년 동안 베트남에서 33명, 캄보디아에서 34명, 라오스에서 4명을 합해 모두 71명에 이르는 전선기자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게 1990년대 들어서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오늘날까지 20여년 사이에 1000명이 넘는 기자가 포괄적 전선에 해당하는 전쟁, 분쟁, 정치혼란 지역 취재 중 숨졌다. 특히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전선기자들은 그야말로 수난의 시대를 맞고 있다. 예컨대 2003년 미국의 제2차 이라크 침공부터 오늘날까지 10년 동안 이라크 한 지역에서만 기자 153명이 희생됐다. 이건 1990년대 이전 140년 동안 전쟁을 취재하다 죽은 기자를 모두 합한 숫자와 맞먹는다. 또 2012년과 올해 기껏 2년 동안 시리아 내전에서만 기자 53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 4년만 따져도 2010년 58명, 2011년 67명, 2012년 88명, 2013년 52명으로 모두 265명이 전선에서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어 나가는 마당에 기자라고
안전할 수만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제2차 이라크 침공에서
기자 96명이 고의로 살해당했다

전쟁 비판 언론 통제 안 되자
직접 공격해 보도 막는 미국
미국의 나팔수 노릇 한다며
기자들 조준 사격하는 반군
전선기자들에겐 인권이 없다

진짜 문제는 희생자 수보다 전선기자를 표적 공격해 살해하는 새로운 현상이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희생당한 전선기자 거의 모두가 교전이나 공습에 말려들어 목숨을 잃었다면,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정부군이나 반군 세력들로부터 살해당하는 경우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2000년 9월 폭발한 팔레스타인 제2차 인티파다(봉기)에서 이스라엘군은 2012년 4월까지 기자들을 무차별 공격해 59명에게 총상을 입히고 6명을 살해했다. 그 무렵 현장을 취재한 내 경험에 따르면, 기자들은 어디서든 팔레스타인 시위대와 상당한 거리를 둔 채 3시나 9시 방향에서 취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이가 한눈에 신분이 드러나도록 프레스(Press)라 쓴 헬멧과 방탄조끼를 착용한 상태였다. 날아가던 총알이 45도로 방향을 바꾼다는 건 죽었다 깨어도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스라엘군이 기자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제2차 이라크 침공에서 숨진 기자 153명 가운데 35%가 교전에 말려들었다면 63%는 목적타로 살해당했다. 그 가운데 16명이 미군한테, 4명이 이라크 정부군한테, 나머지는 각종 반군 세력들한테 살해당했다.

그러니 현장 풍경부터 바뀌었다. 1990년대만 해도 전선기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전선기자들은 누가 봐도 한눈에 정체가 드러나게끔 프레스 표시를 한 헬멧과 방탄조끼로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특히 취재차량 지붕에다 대문짝만한 티브이(TV) 표시를 도배한 채 현장을 드나들고 있다. 이건 이라크, 코소보,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미군과 이스라엘군이 무차별 공습을 해대면서 비롯된 풍경이다. 전선기자들은 희생이 늘어나면서 더 강력한 보호 장비와 장치를 갖췄지만 현실은 거꾸로 더 많은 전선기자를 잡아먹고 있는 꼴이다. 바로 전선기자들을 목적타로 삼은 살해 탓이다. 해서 요즘 경험 많은 전선기자들이 둘러앉으면 취재 중 자신을 드러낼 것인지 감출 것인지를 놓고 설전이 벌어지곤 한다.

처벌은 고사하고 조사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왜 전선기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을까? 그 답은 아주 간단하다. ‘아름다운 무기’니 ‘애국적인 전쟁’ 따위를 나불거리는 정신 나간 기자가 아닌 다음에야 저마다 전쟁을 비판하며 군대의 만행을 고발해왔기 때문이다. 정부군 쪽부터 보자. 예컨대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쟁 패전 원인을 ‘불량배 언론 탓’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다. 그로부터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아주 강력한 전시 언론통제를 들이대기 시작하면서 인류사에 최초로 자유로운 전쟁 취재 기록을 세웠던 베트남전쟁이 결국 전쟁 취재의 종말을 고하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1983년 그레나다 침공 작전을 아예 전선기자가 없는 암흑 속에서 번개처럼 해치웠고, 1989년 파나마 침공 때는 우호적인 10여개 언론사 기자들만 군용기에 태워 가서 합숙소에 집어넣은 뒤 이른바 ‘아름다운 전쟁’만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전시 언론통제는 ‘미군은 정의롭고 미군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오직 한길로 통했다. 그 미군은 2003년 제2차 이라크 침공 때 각국에서 차출한 기자들을 군사훈련시켜 전쟁터로 데리고 다닌 이른바 임베드 프로그램이라는 언론통제술로 기어이 군언 동침을 실현했다. 그럼에도 전시 언론통제가 번번이 뚫리자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는 전선기자들을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선기자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함으로써 전쟁 보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새로운 유형의 전시 언론통제가 그렇게 태어났다. 이스라엘, 영국, 인도네시아가 줄줄이 미국의 새로운 모형을 따르면서 전선기자들을 잡아먹었다.

그사이 반군 쪽 태도도 크게 달라졌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웬만한 반군들은 믿을 만한 선을 달고 들어오는 기자들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기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 시절 나는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스리랑카의 타밀 타이거를 비롯한 수많은 반군 진영을 드나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자 반군들이 적개심을 품고 기자를 해코지하는 일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해 미국이 2001년 9·11 뒤 국제사회를 향해 테러와 전쟁을 선포하면서 거의 모든 무장투쟁 세력들, 심지어 군사정부의 시민 학살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여온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같은 조직들까지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리며 지구 전역으로 전선을 펼치고부터다. 그 과정에서 반군들은 국제 언론이 미국의 나팔수 노릇을 한다고 여기면서 기자들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반군들은 전선기자들을 대놓고 미국 스파이로 몰아세우기 일쑤였다. 실제로 테러와 전쟁 뒤부터 국제 언론들이 반군들 입장과 상황은 철저하게 외면한 채 미군의 승전 소식과 반군 희생자 수만 올리는 일방적인 전황 보도 도구로 전락한 현실을 놓고 본다면 반군 쪽 불만만 탓할 수만도 없다. 전황 보도란 선전이며, 따라서 정부와 군대의 몫일 뿐인데 국제 언론들이 시민사회로부터 위임받은 전쟁 고발과 군대 감시라는 고유한 기능을 포기해버렸으니. 해서 전선기자들은 정부군과 반군 어느 쪽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채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오늘날 전선기자의 위기로 드러난 셈이다.

전선기자를 보호하자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전혀 없진 않았다. 멀리는 1949년 제3차 제네바협정에서 ‘종군기자(군대 신분증 소지자)를 전쟁포로와 동일하게 다룬다’(4조 A항)며 국제 인도주의법으로 보호 규정을 두었고, 1977년 같은 협정 79조 부가의정서 Ⅰ에는 ‘전선기자(민간인 신분증 소지자)는 국제전과 국내 분쟁에서 시민과 같은 조건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덧붙여 놓기도 했다. 오히려 시민을 대량 학살해온 전쟁 현실에서 전선기자를 강제성도 없는 그깟 시민보호 규정 아래 묶어둔들 무슨 쓸모가 있었던 적도 없지만, 어쨌든 생색은 냈다.

지난 11월26일에도 유엔 총회는 11월2일을 ‘국제 기자공격 범죄 불처벌 종식일’이라는 기념일로 제정한다고 만장일치 가결했다. 그런 협정이나 결의들이 지금껏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작동하리라 믿는 기자는 아무도 없다. 그 많은 기자들이 죽고 다치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국제사회는 꿈쩍하지 않았으니. 정부들은 기자들이 살해당할 때마다 기껏 ‘안타깝다’ ‘분노한다’ ‘숭고했다’ 같은 뻔한 성명서 쪽지 하나 날리는 게 다였다. 그 결과 처벌은 말할 나위도 없고 제대로 조사나 수사가 된 경우도 아주 드물었다. 일반 살인 사건 하나를 놓고도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게 현실 아니던가. 전선기자들에겐 아예 인권이 없다는 뜻이다. 인권이 대세로 떠오른 마당에 이제라도 세계시민사회가 전선기자 같은 특정 분야 종사자들의 인권에도 눈길을 돌릴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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