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쏙] 서유럽에 번지는 ‘제노포비아’
시한폭탄 : 이주자들이 항생제 내성이 강한 결핵 박테리아를 영국에 들여올 것이다. 우리가 루마니아에 문을 열면, 항생제 내성이 강한 박테리아가 영국을 휩쓸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경고한다. (<더 선>, 2013년 4월)
‘파키스탄인들이 넘쳐나니, 런던을 피하라’ 루마니아인이 동료 이주자들에게 경고한다. 내년에 영국에 몰려올 채비를 하는 루마니아인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영국 도시들을 욕하고 동료 이주자에 관해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고 있다. (<선데이 익스프레스>, 2013년 2월)
올해 1월1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인에 대한 유럽연합(EU) 내 노동시장 전면 개방을 앞두고 지난해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을 장식한 기사 제목들이다. 오죽하면 트라이안 버세스쿠 루마니아 대통령이 지난해 1월에 이미 “난 영국 당국에 루마니아인이 영국을 ‘침공’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언한다”며 불쾌감을 표현했을까. ‘루마니아인의 침공’이란 표현이 익숙해질 정도로 황색언론이나 극우 정당과 시민단체가 노골적인 동유럽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를 선동하는 걸 비판한 것이다.
동유럽 이주자에 대한 적대감은 서유럽에서 어느새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잡았다. 영국 <비비시>(BBC)는 올해 국립사회연구센터(NatCen)와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영국인 77%가 지금보다 이주민 유입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7일 전했다. 서유럽에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흔히 ‘집시’로 통하는 로마 민족이 많이 사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회원국 시민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고 일자리를 얻도록 허용한 것은 1993년 유럽연합을 창설한 대원칙에 속한다. 유럽연합은 단순히 단일시장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유럽시민의 자유·안전·정의를 공동으로 도모하는 지역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러나 출범 당시 서유럽 중심이던 유럽연합이 2004년 경제 수준이 처지는 폴란드 등 동유럽 10개국을 회원국으로 더해 25개국으로 확장하자 이주 갈등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당시 15개 기존 회원국 가운데 영국·아일랜드·스웨덴 3개국만이 2004년 5월 새로 회원국이 된 동유럽 시민에게 노동시장을 곧바로 개방했다. 이때 영국은 폴란드 등에서 2년만에 50만명 넘게 이주자가 밀려드는 바람에 깊은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
다른 회원국들은 최대 7년까지 노동시장 개방을 유예할 수 있는 조항에 따라 순차적으로 고용시장의 문을 열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폴란드 등보다 늦은 2007년에야 유럽연합에 가입한 탓에 이주민 쇄도를 우려한 9개 나라가 최대 유예 기한인 지난해 말까지 고용시장 개방에 제한을 뒀다. 영국·프랑스·독일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마지못해 노동시장 빗장을 연 영국·프랑스·독일 등의 분위기가 새해 벽두부터 심상치 않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독일이 그나마 견실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프랑스가 침체의 늪에 빠져 있고, 영국이 가까스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적 공포, 실업 공포는 서유럽인들의 삶에도 이미 만연해 있다. 게다가 ‘유럽식 사회모델’인 복지국가는 경제성장의 저하와 재정적자, 만성적 청년실업, 평균수명의 연장을 배경으로 위기론에 흔들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루마니아 등에 문호개방 계기로
“내성 강한 박테리아 몰려온다”
동유럽 출신 혐오증 부추기며
근거없이 ‘복지 도둑’ 몰아 비유럽 외국인에도 관대했던
의료·주택·육아 복지 축소 예정
EU에 노동시장 개방 유예 요청도 이런 상황에서 동유럽 제노포비아는 ‘이주자=복지 도둑’이라는 공식을 공공연하게 입 밖에 내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영국을 필두로 서유럽 정치권은 이주자의 복지 혜택을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복지 분리장벽’ 정책을 앞다퉈 밀어붙이고 있다. 새해 들어 서유럽의 전반적인 복지시스템 변화와 지출 삭감을 두고 각 정치세력들이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주자 복지는 가장 약한 고리다. 당장 영국 보수당 소속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적자국채 발행을 줄여 250억파운드(약 44조원) 규모의 추가 재정지출 감축을 추진하되 절반은 복지지출 삭감에서 충당하겠다고 6일 <비비시>에 밝혔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사회당 소속이지만, 지난달 31일 신년사에서 세금과 사회복지 문제에서 유턴을 선언했다. 그는 14일 연두교서에서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구상을 밝힐 전망이다. 유럽 복지 시스템은 애초 외국인에게도 너그러웠다. 대표적 공공의료 체계인 영국의 국민건강서비스(NHS), 독일의 자녀 수당, 프랑스의 주택 보조금 등 많은 복지 혜택이 유럽연합 소속 동유럽 이주자들은 물론 다른 외국인에게도 폭넓게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주노동자를 ‘우월한 서유럽 복지 혜택을 도둑질하러 온 사람’으로 의심하는 분위기가 노골화하고 있다. ‘노동 이민’도 일자리를 뺏는다는 우려가 있는데, 복지를 노린 ‘빈곤 이민’에 대한 적대감은 훨씬 더 크다. 제도권 정치에서 급부상한 극우파와 복지지출 삭감을 주도하는 정치세력한테 동유럽 제노포비아는 유권자에게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동유럽 등 이주노동자들이 정말로 ‘복지 도둑’인지에 대한 실증적 증거는 한참 부족하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인들의 ‘침공’ 우려가 팽배한 분위기에서 영국 정치권은 새해 첫날인 1일 루마니아발 첫 비행기를 검증하러 공항에까지 나섰지만, 항공기는 만석이 아니었고 새로 영국에 들어오는 루마니아인도 140명 승객 가운데 2명에 그쳤다. 이들 중 한 명인 빅토르 스피에르사우는 “나는 당신들 나라를 훔치러 온 게 아니다. 나는 일한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럽연합 주요 회원국에서 자국 국적자와 다른 회원국 출신 비국적자의 실업률은 큰 차이가 없다. 2012년 기준으로 영국은 국적자 실업률이 7.8%, 다른 회원국 출신은 실업률이 7.4%이다. 프랑스는 국적자는 9.3%인데 다른 회원국 출신은 10.3%다. 독일은 국적자는 4.9%이고, 다른 회원국 출신은 7.1% 수준이다. 유럽연합 내 이주가 일자리를 얻기 위함이지 복지 도둑질을 겨냥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치다. 이들은 취업 기간에는 국적자와 마찬가지로 납세를 하고 있으니 이들을 ‘무임승차’나 ‘도둑질’로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서유럽이 뽐내는 복지는 값싼 인건비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동유럽 이주노동자에 기대고 있다. 노인요양시설과 병원 등은 복지 도둑으로 몰린 동유럽 이주노동자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유럽연합 고용·사회복지와 통합 담당 집행위원인 라슬로 언도르는 “유럽연합은 비상사태의 경우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기 때문에 차단벽을 세울 합당한 이유가 없다”고 짚었다. 하지만 서유럽 정치권은 이미 ‘동유럽 엑소더스’ 공포를 자양분 삼아 이주자 복지 차별 정책의 시동을 걸었다. 영국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직접 나서서 새해부터 이주자들이 입국한 뒤 실업수당을 청구할 자격을 석달 유예하는 등 복지 차별화를 도입했다. 주택복지를 중단하고 국민건강서비스 이용 요율을 더 높이는 방안의 추가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캐머런 총리를 비롯해 보수 정치인들이 나서서 동유럽에 노동시장 빗장을 다시 걸고 전면 개방을 추가로 유예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고 유럽연합에 요구하는 상황이다. 독일 좌우 대연정 안에서도 보수인 기독교사회당이 이주노동자에게 첫 석달간 육아수당 등 사회복지 혜택을 박탈해 빈곤 이민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연정 내 사회민주당은 유럽과 독일의 발전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서로 쉽게 물러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동유럽 이주자 복지 차별이 더 큰 ‘복지 전쟁’의 전초전인 까닭이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내성 강한 박테리아 몰려온다”
동유럽 출신 혐오증 부추기며
근거없이 ‘복지 도둑’ 몰아 비유럽 외국인에도 관대했던
의료·주택·육아 복지 축소 예정
EU에 노동시장 개방 유예 요청도 이런 상황에서 동유럽 제노포비아는 ‘이주자=복지 도둑’이라는 공식을 공공연하게 입 밖에 내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영국을 필두로 서유럽 정치권은 이주자의 복지 혜택을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복지 분리장벽’ 정책을 앞다퉈 밀어붙이고 있다. 새해 들어 서유럽의 전반적인 복지시스템 변화와 지출 삭감을 두고 각 정치세력들이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주자 복지는 가장 약한 고리다. 당장 영국 보수당 소속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적자국채 발행을 줄여 250억파운드(약 44조원) 규모의 추가 재정지출 감축을 추진하되 절반은 복지지출 삭감에서 충당하겠다고 6일 <비비시>에 밝혔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사회당 소속이지만, 지난달 31일 신년사에서 세금과 사회복지 문제에서 유턴을 선언했다. 그는 14일 연두교서에서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구상을 밝힐 전망이다. 유럽 복지 시스템은 애초 외국인에게도 너그러웠다. 대표적 공공의료 체계인 영국의 국민건강서비스(NHS), 독일의 자녀 수당, 프랑스의 주택 보조금 등 많은 복지 혜택이 유럽연합 소속 동유럽 이주자들은 물론 다른 외국인에게도 폭넓게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주노동자를 ‘우월한 서유럽 복지 혜택을 도둑질하러 온 사람’으로 의심하는 분위기가 노골화하고 있다. ‘노동 이민’도 일자리를 뺏는다는 우려가 있는데, 복지를 노린 ‘빈곤 이민’에 대한 적대감은 훨씬 더 크다. 제도권 정치에서 급부상한 극우파와 복지지출 삭감을 주도하는 정치세력한테 동유럽 제노포비아는 유권자에게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다. 동유럽 등 이주노동자들이 정말로 ‘복지 도둑’인지에 대한 실증적 증거는 한참 부족하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인들의 ‘침공’ 우려가 팽배한 분위기에서 영국 정치권은 새해 첫날인 1일 루마니아발 첫 비행기를 검증하러 공항에까지 나섰지만, 항공기는 만석이 아니었고 새로 영국에 들어오는 루마니아인도 140명 승객 가운데 2명에 그쳤다. 이들 중 한 명인 빅토르 스피에르사우는 “나는 당신들 나라를 훔치러 온 게 아니다. 나는 일한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럽연합 주요 회원국에서 자국 국적자와 다른 회원국 출신 비국적자의 실업률은 큰 차이가 없다. 2012년 기준으로 영국은 국적자 실업률이 7.8%, 다른 회원국 출신은 실업률이 7.4%이다. 프랑스는 국적자는 9.3%인데 다른 회원국 출신은 10.3%다. 독일은 국적자는 4.9%이고, 다른 회원국 출신은 7.1% 수준이다. 유럽연합 내 이주가 일자리를 얻기 위함이지 복지 도둑질을 겨냥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치다. 이들은 취업 기간에는 국적자와 마찬가지로 납세를 하고 있으니 이들을 ‘무임승차’나 ‘도둑질’로 확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서유럽이 뽐내는 복지는 값싼 인건비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동유럽 이주노동자에 기대고 있다. 노인요양시설과 병원 등은 복지 도둑으로 몰린 동유럽 이주노동자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유럽연합 고용·사회복지와 통합 담당 집행위원인 라슬로 언도르는 “유럽연합은 비상사태의 경우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기 때문에 차단벽을 세울 합당한 이유가 없다”고 짚었다. 하지만 서유럽 정치권은 이미 ‘동유럽 엑소더스’ 공포를 자양분 삼아 이주자 복지 차별 정책의 시동을 걸었다. 영국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직접 나서서 새해부터 이주자들이 입국한 뒤 실업수당을 청구할 자격을 석달 유예하는 등 복지 차별화를 도입했다. 주택복지를 중단하고 국민건강서비스 이용 요율을 더 높이는 방안의 추가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캐머런 총리를 비롯해 보수 정치인들이 나서서 동유럽에 노동시장 빗장을 다시 걸고 전면 개방을 추가로 유예할 수 있는 선택권을 달라고 유럽연합에 요구하는 상황이다. 독일 좌우 대연정 안에서도 보수인 기독교사회당이 이주노동자에게 첫 석달간 육아수당 등 사회복지 혜택을 박탈해 빈곤 이민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연정 내 사회민주당은 유럽과 독일의 발전을 훼손하는 행위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서로 쉽게 물러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동유럽 이주자 복지 차별이 더 큰 ‘복지 전쟁’의 전초전인 까닭이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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