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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다섯개의 눈, 수백개의 음모

등록 2014-03-07 19:14수정 2014-03-08 11:21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18) 음모론
수수께끼 둘을 잠깐 풀고 가자.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포르노그래피(나체 사진 포함)를 지닌 이는 누구인가? 둘째, 통신정보를 뒷간에 비유한 이는 누구인가?

이번주 뉴스에 그 답이 들어 있다. 그동안 영국 정보기관의 데이터 수집 문제에 비판적이었던 자유민주당 대표이자 현 연립정부 부총리인 닉 클레그가 지난 3일 보수당과 노동당에 인터넷 시대에 어울리는 정보 감시통제법 개혁을 다그치면서부터 통신 감시 기관인 정보통신본부(GCHQ)가 2008~2010년 사이 시신경(Optic Nerve)이라는 작전명 아래 전세계 야후 웹캠 이용자들의 사진을 감시·저장해 왔다는 사실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그 스파이 기관이 수집한 개인 정보 가운데 최대 11%가 성적인 표현들이거나 벌거숭이 사진들이었다고 한다.

같은 날 필리핀 상원 전자통신범죄 청문회 풍경이다. “모든 네티즌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필리핀인터넷자유동맹(PIFA) 고문변호사 마르니 톤손의 말을 법무부 차관보 헤로니모 시는 “우린 정부 화장실에 휴지조차 비치할 능력이 없다”며 정부가 기본적인 통신 감시 능력마저 없다고 되받았다. 톤손은 다시 “필리핀 정부가 이른바 ‘다섯개의 눈’(Five Eyes)에 언제든 정보 감시 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고 대들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이
세계 전역을 도청하고 있고
웹캠까지 엿본다는 소문은
스노든 폭로로 사실 확인 됐지만
미국은 음모론이라며 부정했다

원래 음모론은 정보를 독점한
권력에 대한 저항 수단이었으나
정부·스파이 조직 등이 달려들어
역음모론 뿌리자 ‘프로파간다’
전쟁 도구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렇게 답이 나온 셈이다. 이 이야기들은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안보국(NSA) 계약직 컴퓨터 기술자로 일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2013년 미국 정부가 프리즘(PRISM)이라는 비밀 정보수집 프로그램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야후, 구글, 페이스북, 유튜브, 스카이프, 드롭박스 같은 100여개 회사들과 손잡고 전세계 통화 기록과 인터넷 사용 정보를 수집해온 사실을 폭로하면서부터 벌어진 일이다. 그 과정에서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다섯 나라가 ‘다섯개의 눈’(FVEY로 약칭)이라는 동맹 아래 정보수집과 감시를 위해 공동작전을 벌여온 사실도 드러났다. 근데 되돌아보면 미국이 정보수집 갈퀴로 활용한 ‘다섯개의 눈’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었다. 이미 다섯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뒤부터 유케이유에스에이협정(UKUSA agreement)을 통해 신호정보 공조를 내걸고 이른바 에셜론(ECHELON) 네트워크를 개발해 냉전 기간 내내 소비에트와 동구권을 도청해왔고 2001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내걸고부터는 온 세상으로 통신정보 수집 영역을 넓혀왔다. 그 ‘다섯개의 눈’에 다시 한국·일본·독일·터키·필리핀·노르웨이 같은 나라들이 제3자(the third party)란 이름 아래 참여해왔다.

세상 물정에 밝은 이들이라면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이 그 동맹국들에 세운 정보기지를 통해 세계 전역을 도청하고 있다는 소문쯤은 들어봤을 테고, 한 두어해 전부터는 웬만한 이들도 누군가 웹캠을 엿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미국 정부나 관련 기관들은 모조리 음모론이라고 길길이 뛰었다. 그러던 게 스노든 폭로를 통해 모조리 사실로 밝혀졌다.

UFO에서 9·11 테러까지, 음모론의 진화

오늘은 골치 아픈 그 음모론(conspiracy theory)을 이야기해보자. 무엇보다 요즘 외신판 친구들을 만나면 전에 없이 음모론을 꺼내는 이들이 많다. 본디 외신판이란 게 온갖 비사들이 들끓고 숱한 소문들이 자라나는 곳이라 웬만해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고들 했는데 이젠 그 음모론들을 마냥 무시해버릴 수만은 없는 실정이다. 옛날과 달리 음모론들이 워낙 과학적 논리로 무장한데다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 네트워크를 통해 살포 대상이나 범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통 뉴스 매체 못지않은 대중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음모론의 주제들도 그동안 제1세대 단골메뉴였던 미확인비행물체(UFO) 같은 공상과학류를 넘어 정치·군사·경제·역사·문화·환경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 음모론의 생산 주체들도 아주 다양해지면서 ‘의심’ ‘상상’ ‘창작’을 앞세웠던 전통적 음모론자들의 손을 떠나 정치성이 강한 개인과 특정 이익집단뿐 아니라 정부나 군부나 스파이 조직 같은 공기관까지 달려들어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음모론-역음모론을 뿌려대는 실정이다. 그러니 옛날과 달리 음모론의 사실관계를 따지고 그 배경을 캐고 발원지를 추적하는 일도 만만찮아졌다.

한마디로 이제 음모론들이 그동안 기성 체제와 제도 안에서 정보 생산자로 또 전달자로 군림해왔던 뉴스와 맞대결하는 상황까지 오고 보니 외신판에서도 그 실체를 떠나 음모론을 뉴스 선별작업에서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는 형편이다. 물론 뉴스의 생산과 배급에서 여전히 절대 권력을 지닌 국제공룡자본언론들과 그 하부구조로 편입당해 소비시장 노릇을 해온 각국 언론들은 그런 음모론을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어쨌든 현실은 현실이다.

음모론이라는 용어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 말들이 많지만 현대적 의미로 보자면 대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뛰어들 무렵쯤이 아닌가 싶다. 그 시절 등장한 대표적 음모론이 바로 ‘케네디 암살 배후설’이었고 ‘마릴린 먼로 살해설’ 같은 것들이었다. 이어 ‘히틀러 생존설’이나 ‘달 착륙 조작설’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권력남용이 정치적 스캔들로 번진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놓고 음모론이 불거졌다. 그 사건을 음모론이라고 몰아붙였던 닉슨이 1974년 물러났다. 그렇게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음모론이 처음으로 사실이 되면서 수많은 음모론들이 뒤를 이었다. ‘셰익스피어 가짜설’ ‘에이즈균 제조설’ ‘미국의 통신 탐지설’ 같은 것들이 나타나면서 음모론의 영역이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음모론은 좀 별난 반골들 사이에 나도는 희한한 이야깃거리쯤으로만 여겨졌다.

그 음모론이 2001년 9·11 공격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 지금껏 할리우드 영화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그 9·11 공격 사건을 실시간 뉴스로 지켜보았던 사람들 사이에 ‘이 세상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는 전혀 새로운 인식법이 생겨났고 동시에 사람들은 인터넷을 비롯한 대량살포용 교통수단이 제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음모론이 폭발할 수 있는 최적 조건이 갖춰졌던 셈이다.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믿기 힘든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속 시원히 파주지 못하는 뉴스 대신 음모론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9·11 공격 사건뿐 아니라 미국의 제2차 이라크 침공과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도 어김없이 음모론이 터져 나왔다. 때마다 미국 정부와 기성 언론들은 음모론을 타박했다. 그러나 음모론이라고 몰아세웠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군이 이라크에서 단 한 발의 대량살상무기(WMD)도 찾아내지 못함으로써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로부터 ‘인도양 쓰나미’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일본 대지진’ ‘재스민 혁명’ ‘카다피 살해’ 같은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음모론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잠복해왔던 이른바 ‘일루미나티와 뉴 월드 오더’(Illuminati and New World Order)의 세계정부 인류 지배설 같은 초강력 음모론이 튀어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언론은 음모론의 보모였다

그사이 우리는 2010년 미국 정부의 외교 전문을 폭로한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줄리언 어산지와 2013년 미국 정부의 통신 정보 수집을 폭로한 스노든을 놓고 음모론이 역음모론으로 발전해가는 새로운 유형과 마주쳤다. 두 폭로 사건을 낀 음모론은 일병과 계약직 컴퓨터 기술자라는 저단위 정보 취급자에 의한 석연찮은 비밀정보 획득 과정 못지않게 시의와 사안에 따른 맞춤형 폭로 방법에 대한 강한 의문을 배경에 깔았다. 예컨대 미국이 대이란 공습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2011년 말 난데없이 위키리크스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이 이란 폭격을 주장해온 문건을 폭로해 바람잡이 노릇을 했던 것처럼. 게다가 어산지와 스노든이라는 두 인물의 정체성도 음모론을 키운 배경이 되었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언론자유에다 심지어 반제국주의 깃발까지 들고 나섰으나 정작 모든 정보를 국제공룡자본언론들에 몰아주며 강한 권력지향성만 보였을 뿐 스스로 시민사회의 도구가 아님을 드러냈다.

그 폭로 사건을 놓고 러시아나 중국과 아랍 쪽에서는 미국 중앙정보국 배후설을, 반대쪽 미국 보수진영에서는 거꾸로 러시아와 중국 정보기관 배후설을 음모론에 담아 퍼 날랐다. 그동안 음모론들이 주로 권력과 자본이라는 일정한 타격 목표를 향해왔으나 이 음모론엔 정부 관련 연구기관들이나 스파이 조직들까지 파고들어 전선이 펼쳐지면서 음모론과 역음모론이 마구잡이로 섞여 나왔다. 마침내 음모론이 프로파간다 전쟁 도구로 변하는 시대가 왔다.

인류사에서 시민이 오늘처럼 방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적은 없다. 거꾸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오늘처럼 교활하게 그 정보를 차단하려고 애쓴 적도 없었다. 바로 음모론의 토양이었다. 음모론은 정보독점 권력에 대한 저항의 한 유형으로 태어났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언론이다. 권력과 자본에 빌붙어 감시와 비판이라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언론이 음모론을 키워낸 보모였다. 이미 정부에 맞설 만큼 몸집을 불린 국제공룡자본언론사들은 마음만 먹으면 그동안 음모론이 제기해온 의문들을 얼마든지 파헤쳐낼 능력을 지녔다. 예컨대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다는 9·11 공격 사건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로 남아 온갖 음모론들에 밑감을 대고 있지만 12년이 지나는 동안 그 속살을 들춰보겠다고 달려든 언론사는 없었다. 그 사건 현장을 지척에 둔 <뉴욕 타임스>도 <워싱턴 포스트>도 모조리 입을 닫았다. 마찬가지로 어산지나 스노든의 폭로처럼 세상을 뒤흔들 만한 폭발성을 지닌 사건을 놓고 의문을 달아줘야 할, 그리고 그 의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할 언론은 침묵했다. 독점 보도와 선제 보도에만 눈알을 부라렸을 뿐 그 폭로의 배경과 본질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음모론을 파헤치고 사실을 보도해야 할 국제 언론들이 이제 오히려 ‘일루미나티의 국제언론 지배’ 같은 음모론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음모론은 언론이 무너진 땅에서 피어난 보복의 꽃이었다. 이제 언론이 대답할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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