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남부 빠따니의 이슬람사원인 끄르세 모스크에 남아 있는 학살의 자취. 2004년 4월28일 자유를 외치던 32명의 젊은이가 군경에 쫓겨 이곳으로 피했다가 머리와 심장 등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주검에선 포박당한 흔적도 나와, 체포할 수 있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사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정문태 제공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21) 타이 남부의 핏빛 기억
(21) 타이 남부의 핏빛 기억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차라리 겨울은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가냘픈 생명을 키워냈으니’
적잖은 시인들이 4월을 노래했다. 봄이니 새싹이니 생명 같은 희망조가 많지 않았나 싶다. 근데 정작 4월의 시랍시고 떠오르는 건 늘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오는 이 불편한 몇 구절이 다다. 내게 남은 4월의 시란 것들은 그렇게 절망 가까이서 겨우 목숨 하나 붙들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흘려놓은 마지막 배설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엔 희망이나 생명 같은 고상한 장식들이 없다. 그렇다고 제1차 세계대전 뒤 쑥대밭이 된 유럽 사회의 피폐한 정신을 우려낸 이 시가 내게 곧이 스며들었던 적도 없다. 그저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답답한 세상을 향해 던져놓은 그물에 걸려드는 피라미 같은 것이었을 뿐.
10년 전 이맘때인 2004년 4월28일
타이 남부 무슬림지역 빠따니의
끄르세 모스크에서 32명 살해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는 사이
남부 무슬림 3개주 희생자 6천명
2차대전 때 타이에 저항하면서
영국한테 독립을 보장받았지만
결국 타이에 점령당한 슬픈 땅
지구상 가장 치열한 전선이지만
국제적 무관심 속에 버림받은 땅
설타나와 타이타닉이 침몰했던 잔인한 4월 4월은 잔인했다. 외신기자라는 직업 탓에 늘 역사(뉴스)를 쫓아야 하는 내 눈길에 차올랐던 4월이 그랬다. 1988년부터 해마다 버마 정부군의 건기 대공세가 막바지에 이르는 4월이면 국경 민주·민족혁명전선은 비명으로 뒤덮였고, 소비에트연방이 철수한 뒤 1992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이 내전으로 빠져들던 날도 4월이었다. 통일 예멘이 1994년 다시 남과 북으로 갈려 불을 뿜기 시작한 날도, 반미 민족해방을 꿈꾸었던 크메르 루주의 마지막 본부였던 안롱웽이 1998년 폴 포트 사망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던 날도, 1999년 독립을 향해 가던 동티모르에서 반독립파 민병대가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한 날도 모두 4월 현장의 기억들이다. 그 피로 키워낸 근현대사란 꽃도 4월의 저주받은 축복이었다. 1861년 남북으로 갈려 65만명을 서로 죽인 미국내전도, 터키계가 80만~150만에 이르는 아르메니아계를 살해해 현대사에 최초로 대량학살 기록을 세운 1915년 아르메니아학살도, 1992년 10만명 웃도는 이들을 살해한 보스니아전쟁도, 1994년 내전으로 100만 가까운 이들을 살해한 르완다학살도 모두 4월의 비극으로 출발했다. 1949년 미국과 유럽이 국제 패권주의를 숨긴 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라는 무장동맹을 결성했던 날도,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했던 포클랜드전쟁도, 1961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를 뒤엎겠다며 피그스만(코치노스만)을 침공했던 일도, 1970년 미국이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캄보디아로 전선을 넓혔던 캄보디아 캠페인도, 1986년 미국이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탄사건을 빌미 삼아 전폭기를 동원해 리비아를 무차별 폭격했던 날도 모두 4월의 핏자국으로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그 초강대국 미국한테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준 캄보디아와 베트남 승리의 날도 모두 4월이었다. 그 4월은 핏빛 기억과 욕정을 뒤엎는 보복으로 이어졌다. 현대 과학의 신화들이 무너져 내리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1865년 미시시피강에서 미국 증기선 설타나의 침몰로 1800여명이 숨진 데 이어 1912년 북대서양에서 영국 여객선 타이타닉의 침몰로 다시 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1986년엔 소비에트연방의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대재앙을 예고했다. 그러고 보니 4월은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전쟁광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독일 나치 최고 실권자 아돌프 히틀러와 한때 제2인자였던 루돌프 헤스 그리고 일본 왕 히로히토와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태평양 전선을 이끌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모두 4월생이었다. 이탈리아에선 1945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총살당하면서 파시스트의 막을 내리기도 했다. 이 모두는 4월의 저주였고 그 핏빛 4월의 기록이었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그 피의 저주가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은 4월이 있다. 이제 끄르세 모스크 학살을 기억하는 이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꼭 10년 전 이맘때인 2004년 4월28일 타이 남부 무슬림 지역인 빠따니에서 자유를 외치던 젊은이 서른두명이 군경에 쫓겨 끄르세 모스크로 피신했다. 그날 모두는 유탄발사기까지 쏘아대며 쳐들어간 진압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주검들은 하나같이 머리와 심장에 총상을 입었고 포박당한 흔적도 나왔다. 체포할 수 있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사살했다는 뜻이다. 타이 정부는 그 젊은이들을 무장폭도라고도 했고 테러리스트라고도 했으나 현장에서는 단 한 자루 총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세월만 속절없이 흘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는 사이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을 낀 타이 남부 무슬림 3개 주는 5000~6000여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다. 타이 정부군과 무슬림 분리투쟁 조직들의 무차별 공격이 낳은 그 희생자의 90%는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시민이었다. 2001년부터 13년 동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최정예 특수전 병력과 대량살상용 무기를 동원해 전면전을 벌여온 아프가니스탄에서 시민 희생자가 1만6000~1만9000여명이었다는 사실과 견줘 보면 타이 남부분쟁의 심각성이 잘 드러난다. 젊은이 손에 칼집 지우고 칼을 올린 조작사진 타이 남부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선이 펼쳐진 곳으로 꼽을 만하지만 타이 내부의 해묵은 정치적 혼란과 국제사회의 무관심이 얽혀 버림받은 땅으로 변했다. 얄라이슬람대학 교수 이스마일 룻피 짜빠끼야는 “9·11 공격 뒤부터 이슬람혐오증(Islamphobia)이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상을 폭발적으로 조작해낸 탓”이라며 타이 안팎 언론의 반 무슬림 정서와 폭력적 과장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실제로 타이 언론들은 끄르세 모스크 학살 다음날 일제히 ‘방콕 시민 90%가 무력진압 인정한다’는 정체불명 여론조사 결과를 흘리며 살해당한 젊은이들을 폭도로 몰아붙여 반무슬림 정서를 살포했다. 같은 날 <끄룽텝 투라낏>(Krungthep Thurakij)은 끄르세 모스크에서 살해당한 한 젊은이 손에 들려 있던 칼집을 지우고 칼을 올린 조작 사진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 신문의 조작에 앞서 정부군이 진압작전을 끝낸 뒤 공개한 현장에서 일찌감치 기자들은 내남없이 주검 손에 들려 있던 이상한 칼집에 의문을 달았다. 그 현장 어디에도 정작 칼은 없었다. 언론의 날카로운 칼이 무슬림을 할퀴는 동안 총리 탁신 친나왓은 광적인 불교민족주의를 내걸고 “내가 살아 있는 한 단 1인치 땅도 (독립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며 남부를 무력강공책으로 몰아붙였다. 분쟁은 점점 커져나갔다. 탁신 정부는 2005년 국민화합위원회를 만들어 남부 무슬림의 고유 언어인 야위의 일상적 사용 인정과 비무장 평화군 파견을 비롯한 유화정책을 들고 나섰지만 왕실의 입 노릇을 해온 추밀원 원장 쁘렘 띤나술라논이 “우리는 타이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고 국어는 오직 타이어뿐”이라며 거부해버렸다. 분쟁은 더욱 깊어졌다. 2006년 쿠데타로 탁신 정부를 뒤엎은 손티 분야랏깔린 장군은 “예전 공산주의 폭동을 일으켰던 자들이 남부 혼란에 한몫해 왔을 것”이라며 사태의 본질을 비틀고는 무슬림 무장투쟁 조직들과 협상을 벌이는 한편 무력 사용을 자제하는 회유책을 폈다. 분쟁은 날로 심각해지기만 했다. 2008년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20억달러에 이르는 남부 경제 진흥 자금 투입을 약속했다. 분쟁은 더 악질로 변해갔다.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 정부가 처음으로 분리주의 무장조직 가운데 하나인 민족혁명전선(BNR)과 평화협상에 서명했다. 빠따니연합해방기구(PULO)를 비롯한 10여개에 이르는 남부 무장투장단체들이 정치·군사적 통일전선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평화협상이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교훈만 남겼다. 분쟁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렇게 남부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최악으로 치달아 왔다. 마른 뿌리로 가냘픈 생명을 피워온 빠따니의 4월은 꽃을 피울 수 없다. 남부분쟁은 종교·인종·정치·경제·문화적 차별이라는 뿌리를 왜곡된 역사가 강하게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 교과서는 그 역사를 모조리 지웠다 잊혀진 왕국 빠따니는 일찍이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를 잇는 힌두 불교왕국 스리위자야의 한 축으로 13세기 무렵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여 17세기까지 남중국해를 끼고 해양무역 중심지 노릇을 했다. 빠따니왕국은 1563년 한때 시암왕국(현 타이) 수도 아유타야를 점령할 만큼 세를 키웠으나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지역 강국으로 떠오른 시암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밀려났다. 그 뒤 1902년 빠따니왕국을 무력 합병한 시암은 1909년 말레이반도 식민종주국인 영국과 방콕조약을 통해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선을 그으면서 빠따니왕국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30년이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빠따니 사람들은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타이에 저항하면서 영국으로부터 전후 독립을 보장받았다. 1945년 8월15일 종전과 동시에 빠따니에는 대믈라유빠따니국(Negara Melayu Pattani Raya) 국기가 휘날렸다. 그러나 영국은 빠따니의 독립 약속을 깬 채 말레이반도로부터 떠났고 빠따니는 다시 무력을 앞세운 타이에 합병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타이 정부에 맞선 빠따니의 자치와 독립 외침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빠따니에서는 모두들 몸에 밴 이 몇 줄짜리 역사적 사실을 아는 타이 시민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타이 역사 교과서가 빠따니의 역사를 공백으로 넘겼고 아유타야를 공격했던 빠따니 사람들을 무슬림 기회주의자로 가르쳐온 탓이다. 이 삿된 역사관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지 않고는 남부분쟁을 풀어낼 길이 없다. 남부에 발동한 비상령도, 남부에 파견한 6만명 정예군도, 남부에 퍼부은 돈줄도 분쟁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난 10년 세월이 말해주고 있다. 4월은 그렇게 잔인했다. 4월은 그렇게 폭력적이었다. 그 모두는 사람의 문제였다.
10년 전 이맘때인 2004년 4월28일
타이 남부 무슬림지역 빠따니의
끄르세 모스크에서 32명 살해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는 사이
남부 무슬림 3개주 희생자 6천명
2차대전 때 타이에 저항하면서
영국한테 독립을 보장받았지만
결국 타이에 점령당한 슬픈 땅
지구상 가장 치열한 전선이지만
국제적 무관심 속에 버림받은 땅
설타나와 타이타닉이 침몰했던 잔인한 4월 4월은 잔인했다. 외신기자라는 직업 탓에 늘 역사(뉴스)를 쫓아야 하는 내 눈길에 차올랐던 4월이 그랬다. 1988년부터 해마다 버마 정부군의 건기 대공세가 막바지에 이르는 4월이면 국경 민주·민족혁명전선은 비명으로 뒤덮였고, 소비에트연방이 철수한 뒤 1992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이 내전으로 빠져들던 날도 4월이었다. 통일 예멘이 1994년 다시 남과 북으로 갈려 불을 뿜기 시작한 날도, 반미 민족해방을 꿈꾸었던 크메르 루주의 마지막 본부였던 안롱웽이 1998년 폴 포트 사망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던 날도, 1999년 독립을 향해 가던 동티모르에서 반독립파 민병대가 학살극을 벌이기 시작한 날도 모두 4월 현장의 기억들이다. 그 피로 키워낸 근현대사란 꽃도 4월의 저주받은 축복이었다. 1861년 남북으로 갈려 65만명을 서로 죽인 미국내전도, 터키계가 80만~150만에 이르는 아르메니아계를 살해해 현대사에 최초로 대량학살 기록을 세운 1915년 아르메니아학살도, 1992년 10만명 웃도는 이들을 살해한 보스니아전쟁도, 1994년 내전으로 100만 가까운 이들을 살해한 르완다학살도 모두 4월의 비극으로 출발했다. 1949년 미국과 유럽이 국제 패권주의를 숨긴 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라는 무장동맹을 결성했던 날도,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했던 포클랜드전쟁도, 1961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부를 뒤엎겠다며 피그스만(코치노스만)을 침공했던 일도, 1970년 미국이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캄보디아로 전선을 넓혔던 캄보디아 캠페인도, 1986년 미국이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탄사건을 빌미 삼아 전폭기를 동원해 리비아를 무차별 폭격했던 날도 모두 4월의 핏자국으로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그 초강대국 미국한테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안겨준 캄보디아와 베트남 승리의 날도 모두 4월이었다. 그 4월은 핏빛 기억과 욕정을 뒤엎는 보복으로 이어졌다. 현대 과학의 신화들이 무너져 내리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1865년 미시시피강에서 미국 증기선 설타나의 침몰로 1800여명이 숨진 데 이어 1912년 북대서양에서 영국 여객선 타이타닉의 침몰로 다시 15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1986년엔 소비에트연방의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대재앙을 예고했다. 그러고 보니 4월은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전쟁광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독일 나치 최고 실권자 아돌프 히틀러와 한때 제2인자였던 루돌프 헤스 그리고 일본 왕 히로히토와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태평양 전선을 이끌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모두 4월생이었다. 이탈리아에선 1945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총살당하면서 파시스트의 막을 내리기도 했다. 이 모두는 4월의 저주였고 그 핏빛 4월의 기록이었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세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그 피의 저주가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은 4월이 있다. 이제 끄르세 모스크 학살을 기억하는 이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꼭 10년 전 이맘때인 2004년 4월28일 타이 남부 무슬림 지역인 빠따니에서 자유를 외치던 젊은이 서른두명이 군경에 쫓겨 끄르세 모스크로 피신했다. 그날 모두는 유탄발사기까지 쏘아대며 쳐들어간 진압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주검들은 하나같이 머리와 심장에 총상을 입었고 포박당한 흔적도 나왔다. 체포할 수 있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사살했다는 뜻이다. 타이 정부는 그 젊은이들을 무장폭도라고도 했고 테러리스트라고도 했으나 현장에서는 단 한 자루 총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세월만 속절없이 흘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는 사이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을 낀 타이 남부 무슬림 3개 주는 5000~6000여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냈다. 타이 정부군과 무슬림 분리투쟁 조직들의 무차별 공격이 낳은 그 희생자의 90%는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시민이었다. 2001년부터 13년 동안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최정예 특수전 병력과 대량살상용 무기를 동원해 전면전을 벌여온 아프가니스탄에서 시민 희생자가 1만6000~1만9000여명이었다는 사실과 견줘 보면 타이 남부분쟁의 심각성이 잘 드러난다. 젊은이 손에 칼집 지우고 칼을 올린 조작사진 타이 남부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선이 펼쳐진 곳으로 꼽을 만하지만 타이 내부의 해묵은 정치적 혼란과 국제사회의 무관심이 얽혀 버림받은 땅으로 변했다. 얄라이슬람대학 교수 이스마일 룻피 짜빠끼야는 “9·11 공격 뒤부터 이슬람혐오증(Islamphobia)이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부정적 인상을 폭발적으로 조작해낸 탓”이라며 타이 안팎 언론의 반 무슬림 정서와 폭력적 과장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실제로 타이 언론들은 끄르세 모스크 학살 다음날 일제히 ‘방콕 시민 90%가 무력진압 인정한다’는 정체불명 여론조사 결과를 흘리며 살해당한 젊은이들을 폭도로 몰아붙여 반무슬림 정서를 살포했다. 같은 날 <끄룽텝 투라낏>(Krungthep Thurakij)은 끄르세 모스크에서 살해당한 한 젊은이 손에 들려 있던 칼집을 지우고 칼을 올린 조작 사진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 신문의 조작에 앞서 정부군이 진압작전을 끝낸 뒤 공개한 현장에서 일찌감치 기자들은 내남없이 주검 손에 들려 있던 이상한 칼집에 의문을 달았다. 그 현장 어디에도 정작 칼은 없었다. 언론의 날카로운 칼이 무슬림을 할퀴는 동안 총리 탁신 친나왓은 광적인 불교민족주의를 내걸고 “내가 살아 있는 한 단 1인치 땅도 (독립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며 남부를 무력강공책으로 몰아붙였다. 분쟁은 점점 커져나갔다. 탁신 정부는 2005년 국민화합위원회를 만들어 남부 무슬림의 고유 언어인 야위의 일상적 사용 인정과 비무장 평화군 파견을 비롯한 유화정책을 들고 나섰지만 왕실의 입 노릇을 해온 추밀원 원장 쁘렘 띤나술라논이 “우리는 타이 사람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고 국어는 오직 타이어뿐”이라며 거부해버렸다. 분쟁은 더욱 깊어졌다. 2006년 쿠데타로 탁신 정부를 뒤엎은 손티 분야랏깔린 장군은 “예전 공산주의 폭동을 일으켰던 자들이 남부 혼란에 한몫해 왔을 것”이라며 사태의 본질을 비틀고는 무슬림 무장투쟁 조직들과 협상을 벌이는 한편 무력 사용을 자제하는 회유책을 폈다. 분쟁은 날로 심각해지기만 했다. 2008년 아피싯 웨차치와 총리는 20억달러에 이르는 남부 경제 진흥 자금 투입을 약속했다. 분쟁은 더 악질로 변해갔다.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 정부가 처음으로 분리주의 무장조직 가운데 하나인 민족혁명전선(BNR)과 평화협상에 서명했다. 빠따니연합해방기구(PULO)를 비롯한 10여개에 이르는 남부 무장투장단체들이 정치·군사적 통일전선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평화협상이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교훈만 남겼다. 분쟁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렇게 남부분쟁은 걷잡을 수 없는 최악으로 치달아 왔다. 마른 뿌리로 가냘픈 생명을 피워온 빠따니의 4월은 꽃을 피울 수 없다. 남부분쟁은 종교·인종·정치·경제·문화적 차별이라는 뿌리를 왜곡된 역사가 강하게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 교과서는 그 역사를 모조리 지웠다 잊혀진 왕국 빠따니는 일찍이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를 잇는 힌두 불교왕국 스리위자야의 한 축으로 13세기 무렵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여 17세기까지 남중국해를 끼고 해양무역 중심지 노릇을 했다. 빠따니왕국은 1563년 한때 시암왕국(현 타이) 수도 아유타야를 점령할 만큼 세를 키웠으나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지역 강국으로 떠오른 시암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밀려났다. 그 뒤 1902년 빠따니왕국을 무력 합병한 시암은 1909년 말레이반도 식민종주국인 영국과 방콕조약을 통해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선을 그으면서 빠따니왕국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30년이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빠따니 사람들은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타이에 저항하면서 영국으로부터 전후 독립을 보장받았다. 1945년 8월15일 종전과 동시에 빠따니에는 대믈라유빠따니국(Negara Melayu Pattani Raya) 국기가 휘날렸다. 그러나 영국은 빠따니의 독립 약속을 깬 채 말레이반도로부터 떠났고 빠따니는 다시 무력을 앞세운 타이에 합병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타이 정부에 맞선 빠따니의 자치와 독립 외침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빠따니에서는 모두들 몸에 밴 이 몇 줄짜리 역사적 사실을 아는 타이 시민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타이 역사 교과서가 빠따니의 역사를 공백으로 넘겼고 아유타야를 공격했던 빠따니 사람들을 무슬림 기회주의자로 가르쳐온 탓이다. 이 삿된 역사관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지 않고는 남부분쟁을 풀어낼 길이 없다. 남부에 발동한 비상령도, 남부에 파견한 6만명 정예군도, 남부에 퍼부은 돈줄도 분쟁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난 10년 세월이 말해주고 있다. 4월은 그렇게 잔인했다. 4월은 그렇게 폭력적이었다. 그 모두는 사람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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