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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아세안, 무시무시한 무시

등록 2014-05-23 18:30수정 2014-05-25 17:14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23) 아세안과 한국 언론
“현장에 한국 기자는 한 명도 안 보이던데. 이러다 한류도 다 떨어지는 거 아냐?”

“한국 언론이 아직 정신없을 거야. 침몰했잖아. 배도 나라도….”

“그러면 한국 언론엔 요즘 국제 뉴스가 아예 없나?”

“그런 건 아니지만….”

지난 10~11일 이틀 동안 버마(미얀마)의 네피도에서 열렸던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를 취재하고 돌아온 타이 <네이션> 기자 수팔락 깐짜나쿤디와 나눴던 이야기 한 토막이다. 참 어색했다. “한국 특파원들은 골프장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외신판의 해묵은 비아냥거림이 또 도지지나 않을지….

전화를 끊자마자 한국 언론사들 기사를 검색할 수 있는 웹사이트로 들어갔다. 그이 말이 옳았다. 한국 언론사 가운데 현장발 기사를 올린 신문이나 방송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세계화의 첨병을 자처해온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말할 것도 없고, 창간 때부터 제3세계에 관심을 가지겠다고 선언했던 <한겨레>도 마찬가지였다. 공영성을 외쳐 온 <한국방송>(KBS)이나 <문화방송>(MBC) 같은 방송들뿐 아니라 각 언론사에 뉴스를 공급하는 <연합뉴스>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5월10~11일 버마 네피도에서
동남아 10개 회원국 거느린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렸지만
한국 언론은 담합이라도 한 듯
거의 뉴스로 다루지 않았는데…

1997년부터 아세안+3의 일원
2010년부터 전략적 동반자관계
다른 언론은 그렇다 쳐도
최소한 시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연합뉴스> 등은 현장 갔어야

내년 ‘아세안 경제통합’에 관심 없는가

왜 아세안 정상회의를 화두로 삼았는지부터 잠깐 살펴보고 가자. 아세안은 베트남전쟁 때인 1967년 인도네시아, 타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다섯 나라가 반공을 내걸고 출범한 뒤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버마, 캄보디아를 받아들여 현재 동남아시아 10개국 모두를 회원국으로 거느린 지역연합체다. 그 아세안은 유럽연합(EU)을 본보기 삼아 2015년 경제통합에 이어 정치·안보·사회·문화까지 차례로 통합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 한국은 1989년 아세안과 대화관계를 맺은 뒤 1997년부터 아세안+3(한국·중국·일본)의 일원이 되었고 2010년엔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었다. 말 그대로다. 한국한테 아세안은 중국과 일본을 벗어나면 바로 마주칠 만큼 지정학적으로 중대한 전략 대상 지역이다. 모두들 경제, 경제를 외치니 수치로 따져 보자. 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원유 수송 80%가 아세안을 지날 뿐 아니라 지난해 한국과 아세안의 교역량만도 1353억달러(수출 820억달러/수입 533억달러)였다. 인구 6억1300만을 거느린 아세안이 한국엔 중국 다음으로 큰 시장 노릇을 했다. 게다가 한국의 아세안 투자가 576억달러에 이른다. 한국의 최대 투자지역이 아세안이다. 지난해 한국과 아세안 사이의 인적 왕래도 570만명을 넘었다. 한 해 동안 한국인 430만명이 아세안을 드나들었다. 한국인에게 최대 방문지역이 아세안이다. 집계에 잡힌 수치만 따져도 한국 사람 28만명이 아세안에 뿌리를 내렸고 아세안 사람 32만명이 한국에 살고 있다.

바로 그런 아세안의 열 나라 대통령과 총리들이 모두 모였던 자리가 네피도 아세안정상회의였다. 더구나 한국은 올 12월 이른바 아세안+한국이라는 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준비하고 있다. 근데 한국 언론은 그 아세안 정상회의를 일제히 무시했다. 10개가 넘는 전국 일간지와 그 수치에 버금가는 방송들이 마치 담합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그 아세안 정상회의를 뉴스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언론사들이 국제면을 놓고 독립적인 편집을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그 무렵 네피도에서는 <로이터> <에이피> <신화통신> 같은 뉴스에이전시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뉴욕 타임스> <아사히신문> <비비시> 같은 온갖 언론사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외신판에서 뉴스 가치 판단은 사건과 사고를 제외하곤 해당국과 정치·경제적 연관성을 첫째로 잡고, 그다음엔 각국 최고위급 정치인들의 움직임을 쫓고, 이어 자국민 관련성을 꼽는 게 일반적인 틀이다. 그 세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뉴스라면 마땅히 헤드라인으로 뽑는다. 앞서 한국과 아세안 관계를 살펴봤듯이, 외신판을 아는 이들이라면 누가 봐도 아세안 정상회의는 한국 언론한테 헤드라인감이다. 그동안 미국과 유럽을 중심에 놓고 국제면 판짜기를 해 왔던 한국 언론들이 눈길을 넓혔다고는 하지만 그 대상이 중국이고 일본일 뿐 여전히 아시아를 소 닭 보듯 한다는 사실이 이번 아세안 정상회의를 통해서 잘 드러난 셈이다.

연합뉴스 방콕 특파원조차 외신을 인용

한국 언론 입장에서는 찾아다니면서라도 아세안을 파고들어야 할 형편인데 차려진 밥상조차 못 먹은 꼴이다. 한국 언론이 아세안에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다녀야 할 까닭은 정상회의 말고도 지천에 깔렸다. 당장 내년 아세안 경제통합(AEC)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그 아세안 통합은 한국한테 이문을 주겠다는 게 아니다. 한국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안보·사회·문화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경쟁국들과 더 힘들게 치고받아야 할 처지다. 그게 미국이고, 중국이고, 일본이고 유럽이다. 그런 것 말고도 아세안 시민들 의지와 무관하게 정치인과 자본가들의 일방적 놀음으로 달려온 통합의 본질적 문제들을 세계시민의 눈으로 파헤치는 일도 시급한 과제다.

다시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렸던 10~11일과 하루 뒤인 12일까지 한국 언론을 훑어보자. 결론. 취재는커녕 기사 하나 올린 매체가 없었다. 기껏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겨레>가 남중국해 분쟁을 다루면서 아세안 정상회의를 몇 마디 옮긴 게 다다. <조선일보>는 10일치 국제면 뉴스 다섯 꼭지 가운데 세 꼭지를 ‘일본 지자체 절반 고령화’를 비롯해 시의성마저 희박한 일본 관련 기사로 메웠고, 12일치 국제 두 면을 ‘우크라이나 동부 독립투표’ 말고는 모조리 가십 같은 기사로 때웠다. 방송도 그랬다. 11일 <에스비에스>(SBS)와 12일 <케이비에스>도 남중국해 분쟁을 놓고 아세안 정상회의를 잠깐 입에 올렸을 뿐이다.

무엇보다 네피도와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방콕에 지국과 특파원을 두고 있는 연합뉴스, 케이비에스, 엠비시가 수상하다. 이 매체들은 시민 세금을 투입하는 공공재 성격을 지녔고 따라서 주인이자 뉴스 소비자인 시민사회에 충실히 봉사할 의무를 지녔다. 그 봉사란 건 취재와 보도다. 근데 그 지국들이 자신들의 취재 영역인 아세안 정상회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보도조차 제대로 안 했던 케이비에스와 엠비시는 제쳐두고 그나마 외신이라도 따서 기사를 올렸던 연합뉴스를 본보기로 들어보자. 연합뉴스는 그 기간 동안 11일 ‘아세안 정상회담, 남중국해분쟁 주요 의제로 논의’를 비롯한 기사 다섯 꼭지를 올렸다. 방콕 특파원이 송고한 그 기사들은 서울에 앉아서도 누구나 볼 수 있는 <교도통신> <에이피> 같은 뉴스에이전시나 방콕 영자신문 <네이션>을 인용했다. 달리 말하면 서울에 앉아서도 쓸 수 있는 기사였다는 뜻이다. ‘현장 없는 기자’ ‘취재 없는 기사’는 결국 서울과 방콕 지국 사이의 차별성을 보여줄 수 없는 한계만 드러낸 셈이다. 돈 들여 해외 지국을 운영하고 특파원을 파견한 까닭이 의문스런 대목이었다.

외신판 상식으론 연합뉴스의 사연이 궁금하다. 뉴스거리가 아니라고 여겼든지, 인력이 모자랐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예산이 쪼들렸든지…, 근데 뭐가 됐든 궁색하긴 마찬가지다. 같은 시간, 버마에 지국을 지닌 로이터 같은 몇몇 뉴스에이전시를 뺀 거의 모든 국제 언론사들이 방콕 특파원들을 네피도에 파견했다. 국제 언론사들이 이 세상 모든 나라에 지국을 열고 특파원을 파견할 수 없는 형편은 다 똑같다. 그래서 웬만한 언론사들은 방콕이나 싱가포르쯤에 지국 하나를 두고 동남아시아 전역을 취재해 왔다. 어차피 기자 하나나 지국 하나가 온 세상 뉴스를 다 취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외신판에서는 취재 가부를 놓고 뉴스 가치 판단에 머리를 싸맸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각 언론사들의 방콕이나 싱가포르 지국은 좋든 싫든 전통적으로 아세안 정상회의를 가장 큰 뉴스로 다뤄왔다. 속살을 파보면 그런 행사는 취재 목적만도 아니다. 적어도 연합뉴스나 케이비에스처럼 스스로 국가대표급 언론사라 여긴다면 현장에 얼굴을 내미는 게 외신판 상식이다. 아세안 같은 국제 정치판은 각국 언론사들의 등장을 놓고 상대국의 관심을 헤아리곤 한다. 이게 흔히 말하는 외신판의 외교이고 사교다.

교도통신은 왜 동티모르를 떠나지 않았나

옛날이야기 한 토막. 1990년대 말 프놈펜에 상주했던 일본 신문과 방송들이 뉴스거리가 수그러들자 하나둘씩 발을 빼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교도통신 프놈펜 지국장이었던 친구는 “우리도 철수할 계획인데 아직 <요미우리신문>이 남아 있어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언론사에 뉴스를 공급하는 교도통신은 우리로 따지면 연합뉴스인데 그 소비자 하나를 위해 끝까지 현장을 지켰다. 그 교도통신은 1999년 동티모르 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들이 온 천지를 불바다로 만들면서 모든 일본 기자들이 철수했을 때도 자신들의 소비자를 위해 현장에 남아 기사를 날렸다. 그동안 수많은 세계 언론사들이 교도통신이 취재한 국제 뉴스를 받아 쓴 까닭이다. 나는 25년 넘게 외신판에서 일하는 동안 한국 관련 사안을 제외한 순수 국제 뉴스에서 연합뉴스를 인용하는 외신이나 국제 언론사를 본 적이 없다. 현재 40여개 해외 지국에 특파원을 파견해 놓은 연합뉴스가 현장을 뛰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오죽 현장을 멀리했으면 연합뉴스 5월9일치에 ‘태국 반탁신 진영 최후의 결전 시위 현장 가보니’란 제목의 기사가 뜰 정도다. 이젠 언론사나 독자들도 굳이 연합뉴스가 외신과 현지 신문을 번역해서 제공하지 않더라도 서울에 앉아 실시간으로 뉴스를 받아볼 수 있는 세상이다.

시민이 공공재 뉴스 매체들한테 바라는 건 장사를 잘해서 회사가 큰 이문을 남겼느니 어쨌니 따위가 아니다. 시민은 현장에서 건진 팔팔 살아 있는 뉴스와 남다른 정보를 원한다. 시민이 돈을 내고 보는 상업 신문이나 방송들에 바라는 바도 전혀 다르지 않다. 세월호 사건 뒤 한국 언론사들이 저마다 공정성 시비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시민사회의 인내력이 한계에 닿았다는 뜻이다. 취재의 방향이나 보도의 옳고 그름만이 공정성이 아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뉴스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 공정성의 첫발이다. 내남없이 외신과 국제면을 만지는 기자들이 스스로 회초리를 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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