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모독죄에 대한 군부의 정치적 이용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난 5월25일 군 수사기관에 출두하는 <네이션> 기자 쁘라윗 로짜나프륵. “나를 잡아넣을 순 있어도 내 양심은 가둘 수 없다”는 의미로 검은 테이프로 입을 가린 채 귀를 막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24) 타이 쿠데타와 언론통제
(24) 타이 쿠데타와 언론통제
“군이 총선을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방콕 포스트> 기자 왓사나 나누암이 물었다. “의회와 임시정부 총리를 곧 지명할 것인가?” <타이랏> 기자 수파륵 통차이릿이 물었다.
5월22일 쿠데타로 권력을 쥔 쁘라윳 짠오차 육군 참모총장이 26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한테 국가평화질서평의회(NCPO)를 추인받은 뒤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첫 기자회견장이었다.
다음날, 군사전문기자로 이름난 그 둘은 육군본부로 불려갔다. 폰팟 완나팍 소장은 “그런 강압적인 질문은 적절치 않았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질문하지 말라. 언론은 쁘라윳 장군을 성원해야 한다”며 경고까지 덧붙였다. “지도자에 대한 믿음과 사태 해결을 방해하는 행동에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한해 4~5건이던 왕실모독죄
2006년 쿠데타 뒤부터
420건 넘을 만큼 폭발적 증가
친탁신과 반탁신 진영이
반대파 공격용으로 사용한 탓
방송사 데스크에 총 든 군인들
위성채널 14개 방송 중단하고
3천개 넘는 지역라디오 폐쇄
내부송출 막고
페이스북까지 검열대상 삼아
1992년 5월항쟁과 타이 언론의 승리
두 기자의 질문이 그렇게도 강압적이고 부적절했던가? 그 질문들이 군 지도자의 신뢰성과 사태 해결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오직 그 답을 알고 있는 쿠데타 군인들은 앞서 20일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언론 검열부터 들고나왔다. <채널3>을 비롯한 모든 방송사 데스크에 총 든 군인들이 똬리를 틀었고, 친탁신계 <보이스 티브이>(Voice TV)와 반탁신계 <에이에스 티브이>(ASTV)를 포함한 위성 채널 14개는 아예 방송을 중단시켰다. 또 3천개 넘는 지역 공동체라디오를 폐쇄했고 외신인 <시엔엔>과 <비비시> 방송의 타이 내부 송출까지 막았다. 신문과 인쇄 매체에 검열 명령을 내린 데 이어 200여개에 이르는 인터넷 사이트를 차단했고 페이스북, 트위터, 라인, 유튜브 같은 소셜미디어까지 검열 대상으로 삼았다.
한편 군은 22일 인터넷으로 정규 프로그램을 내보낸 <피비에스>(PBS) 부국장 완차이 딴띠위타야피탁을, 23일 <파디아우깐>(같은 하늘이라는 뜻) 편집장 타나폰 이우사꾼을 쿠데타 반대 시위 현장에서 각각 체포했다. 25일에는 그동안 왕실모독죄의 정치적 이용을 줄기차게 고발해 온 <네이션> 기자 쁘라윗 로짜나프륵을 구금했다.
이게 이번 쿠데타 군인들의 정체다. 군은 지난 몇 달 동안 이어져온 잉락 친나왓 총리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를 해결하겠다며 평화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튀어나왔으나 그 폭력과 아무 상관 없는 언론부터 조졌다.
그러고 보니 쿠데타 군인들이 언론사를 점령하고 검열을 들이대며 기자들 숨통을 죄었던 건 타이 현대정치사의 전통이었다. 1932년 입헌군주제 뒤 이번 5월까지 82년 동안 성공한 쿠데타만 19번이었고 그새 스쳐간 총리 28명 가운데 장군 15명이 무려 56년 5개월이나 정치판을 주무르는 동안 언론은 늘 그렇게 수모를 겪어왔으니.
1950~1970년대 현장을 뛰었던 외신판 선배들 이야기에 따르면 그 무렵 악명 떨쳤던 쁠랙 피분송크람, 사릿 타나랏, 타놈 끼띠카쫀 같은 쿠데타 장군들이 언론을 적진처럼 유린했던 탓에 1973년 시민항쟁에서부터 1976년 탐마삿대학 학살 전까지 3년쯤을 빼고 나면 언론이 자유로운 시절이 없었다고들 한다.
1980년대 끝물쯤 방콕에 발을 디뎠던 나는 무엇보다 외신판 규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베트남전쟁 때부터 동남아시아의 외신 기지 노릇을 했던 방콕엔 웬만한 국제 언론사들이라면 모두 특파원을 파견한데다 수많은 프리랜서들이 몰려들면서 1천명 가까운 외신기자들이 득실거렸다. 게다가 국제화된 방콕이라는 도시가 주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까지 겹쳐 그야말로 외신천국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흥분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고 이내 불편한 현실과 마주쳤다. 만나는 선배들마다 “왕실은 절대 건드리지 마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해댔다. 특히 군주제를 경험하지 못했던 나와 같은 외신기자들은 비록 타이 사회의 정치·문화적 차별성을 존중하더라도 언론 앞에 왕실모독죄(Lese-majeste)라는 금기가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든 장애로 다가왔다. 결국 외신기자들은 내남없이 그 금기를 돌파해나갈 ‘기술적’인 문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나는 타이에서 1991년, 2006년에 이어 이번 5월까지 모두 세 차례 쿠데타를 경험하게 되었다. 내 기억에 어떤 명분을 내세웠든 쿠데타는 쿠데타였을 뿐, 그 모두는 언론 통제로부터 출발했던 공통점을 지녔다. 언론사 점령, 정규 방송 중단, 왕실 찬가 방송, 검열 포고령은 때마다 되풀이한 해묵은 메뉴였다. 다만, 1991년 쿠데타는 타이 언론사(言論史)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아니었던가 싶다. 199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수찐다 크라쁘라윤 장군을 1992년 5월 시민항쟁으로 쫓아내던 시절 비로소 언론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5월18일 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적잖은 타이 기자들이 그 학살 현장을 끝까지 지켜냈다는 사실만으로도 타이 언론의 승리라고 부를 만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쿠데타 군인들의 발포 현장 취재는 비교적 자유로운 외신기자들이 도맡다시피 했다. 언론사들도 예전처럼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폐쇄당했던 <네이션>과 <마띠촌> 같은 신문들은 군인들의 시민 학살을 호외로 찍어 돌렸고 1면 전체가 펠트펜으로 지워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나 사설란이 지워진 <방콕 포스트>도 검열을 뚫고 가판대에 올랐다. 그 무렵 타이 언론의 저항은 베트남전쟁 뒤 불어닥친 자유주의 바람을 쐰 기자들과 경제성장으로 몸집을 불린 언론사들의 자신감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로 볼 만했다. 으레 그 바탕에는 중산층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폭발적인 지지가 깔려 있었지만.
왕실이 제소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어
1992년 시민항쟁 뒤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 10여년 동안 타이 언론은 비교적 큰 자유를 누렸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적어도 정치권에 주눅 들던 시대는 끝났다. 그동안 타이 언론에 전통처럼 내려오던 군부와 불교에 대한 금기도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1년 탁신 친나왓 총리가 집권하면서 타이 언론은 다시 한 번 철퇴를 맞았다. 탁신 정부가 진보 진영 출신들을 끼고 등장할 때만 해도 기자들 사이에 언론자유의 바람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민중을 외치며 나타난 탁신이 머잖아 정부, 의회, 군, 경찰, 경제를 모조리 손아귀에 쥔 제왕적 권력을 구축하면서 쿠데타 정권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언론탄압이 되살아났다. 모든 방송 채널을 장악한 탁신은 유일한 독립방송사였던 <아이티브이> (iTV)까지 사들여 언론노동자들을 대량 불법 해고하면서 대 언론 선전포고를 했다. 이어 탁신은 친구인 그래미그룹을 통해 <마띠촌>과 <방콕 포스트>를 적대적 기업인수합병으로 사들이려다 사회적 반발에 부딪치자 비판적인 주요 언론인들의 개인계좌를 불법으로 뒤져가며 재갈을 물렸다. 그 과정에서 탁신은 막대한 광고예산을 주무르며 언론사들을 밀어붙이는 한편 명예훼손 소송으로 기자들의 숨통을 조였다.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와 <이코노미스트> 특파원들을 추방하고 판매 금지령을 내리며 외신으로까지 전선을 확대했던 초유의 사태가 모두 그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시아 전역을 통틀어 민간정부가 언론 통제에 그토록 목매달았던 경우는 없었다.
2006년 가을, 이제는 절대 쿠데타가 없다고 믿었던 타이 사회에서 15년 만에 다시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나왔다. 탁신을 쫓아낸 손티 분야랏깔린 육군 참모총장도 어김없이 언론사부터 점령했다. 그로부터 타이의 언론자유가 치명상을 입는다. 2008년 군인정부가 물러나고 정당 정치가 되살아나면서 친탁신과 반탁신 정부가 차례로 등장했고 언론 검열도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극단적인 진영논리가 파고들었다. 레드셔츠(친탁신)와 옐로셔츠(반탁신)로 갈린 정치판을 놓고 언론사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 공정성을 잃어갔다. 그동안 탁신 정부, 쿠데타 정부, 친탁신 정부, 반탁신 정부 가림 없이 비판해왔던 쁘라윗 같은 기자들이 신문사 안팎에서 설 자리가 마땅찮다는 건 타이 언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일그러진 진영 논리 속에서 언론자유를 압박해온 도구가 바로 형법 제112조 왕실모독죄다. ‘누구든 왕과 왕실을 비방, 모독, 협박하면 3년에서 15년 형에 처한다’고 규정한 왕실모독죄는 절대왕정 시절인 1908년 등장한 뒤 오늘까지 17번씩이나 헌법이 바뀌는 동안에도 줄기차게 자리를 지켜왔다. 돌이켜 보면 1990년부터 2005년까지는 왕실모독죄 사례가 한 해 4~5건 지나지 않았으나 2006년 쿠데타 뒤부터 지금까지 420건이 넘을 만큼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건 2006년 쿠데타 뒤부터 친탁신과 반탁신 진영들이 왕실모독죄를 반대파 공격용 무기로 사용했던 탓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왕실이 왕실모독죄를 통해 제소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오히려 푸미폰 국왕은 2005년 생일잔치 때 “사실은 나 자신도 비판받아야 한다. 그래야 내 잘못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왕도 잘못할 수 있다”고 했다.
아프간보다 낮은 타이 언론자유 지표 130위
아무튼, 타이 현대사에서 왕실모독죄가 이토록 기승을 부린 적은 없었다. 그사이 왕실모독죄는 주류 언론보다 오히려 인터넷 매체나 소셜미디어 같은 시민들의 표현 수단에 집중타를 가했다. 표현의 자유가 짓밟힌 땅에서 언론의 자유를 말한다는 건 지나친 사치다.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2014년 언론자유 지표에서 타이를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보다 두 단계 낮은 130위에 올려둔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참고로 한국은 57위다.
이러니 타이 기자고 외신기자고 저마다 정신적 장애를 겪을 수밖에는. 기사를 쓸 때마다 자동으로 떠오르는 형법 제112조는 기자들에게 견디기 힘든 굴욕감을 안겨준다. 표현의 자유가 제압당한, 그리하여 언론자유가 뭉개진 타이에서 기자로 산다는 건 줄 타는 광대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기사 때문에 타이 정부와 몇 차례 불편함을 겪었던 나는 이 꼴난 글을 놓고도 지웠다 쓰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내 친구 쁘라윗이 출두에 앞서 입과 귀와 눈을 막은 채 “나를 잡아넣을 순 있어도 내 양심은 가둘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르는 비굴한 밤이다.
2006년 쿠데타 뒤부터
420건 넘을 만큼 폭발적 증가
친탁신과 반탁신 진영이
반대파 공격용으로 사용한 탓
방송사 데스크에 총 든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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