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전범 천여명 스파이 활동”
유대인 학살 설계자 볼슈빙 등
냉전때 옛 소련 대항마로 활용·보호
유대인 학살 설계자 볼슈빙 등
냉전때 옛 소련 대항마로 활용·보호
1960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로 악명 높았던 나치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찾아내 체포했을 때,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아이히만의 부하였던 오토 폰 볼슈빙이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볼슈빙은 이스라엘이 미국에 살고 있던 자신도 찾아내 잡아갈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볼슈빙은 아이히만의 측근이었으며 나치의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학살의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미 중앙정보국은 1961년 볼슈빙에게 그와 아이히만의 관계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겠다며 보호를 약속했다. 볼슈빙이 미 중앙정보국의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미 중앙정보국과 연방수사국(FBI), 그리고 미군이 냉전 시대에 나치 복무 전력자 1000명 이상을 스파이나 정보원으로 활용했다고 26일 보도했다. 미국 정보 당국이 나치 전력자들을 스파이로 활용해왔다는 이야기는 1970년대부터 단편적으로 흘러나왔다. <뉴욕 타임스>는 비밀해제된 문서 수천건과 관계자 인터뷰를 근거로,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고 광범위한 협력 관계가 존재했다고 전했다.
미 정보 당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적국이었던 독일의 나치 복무자들이 소련에 대항하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의 과거 경력은 문제 삼지 않았다. 1950년대 미 중앙정보국 국장을 지낸 앨런 덜레스는 ‘온건한 나치는 미국에 쓸모가 있다’고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죽을 때까지 미 연방수사국 국장을 지낸 에드거 후버는 나치 복무자들의 악행 전력을 옛 소련의 선전이라며 무시했다고 한다.
미국이 나치 복무자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미군은 소련 침공 상황을 가정하고 메릴랜드에서 전직 나치 장교들에게 낙하산 침투 훈련을 시켰다. 미 중앙정보국은 동구권 국가들의 우표에 담긴 숨은 뜻을 나치 복무자들에게 연구시켰다. 리투아니아 경찰 출신 나치 부역자인 알렉산드라 릴레이키스가 나치의 리투아니아 내 유대인 학살을 도운 경력을 알면서도, 1952년 그를 동독에서 스파이로 일하게 했고 4년 뒤 미국 이민도 주선했다. 나치 복무자들도 미국을 은신처 등으로 활용했다.
미 정보당국은 1990년대까지도 나치 출신 스파이들과의 관계를 숨겨왔다. 미 연방수사국은 1980년에 미 법무부 소속 나치 범죄 담당 부서가 미국에 살고 있는 나치 관련 범죄 혐의자 16명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한 요청도 거절했다. 1994년 미 중앙정보국은 리투아니아 유대인 학살을 도운 혐의로 릴레이키스가 기소될 위기에 처하자, 검찰에 기소하지 말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미국이 스파이로 활용한 나치 관련자들은 1000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밀해제 문서 연구팀에서 활동하는 플로리다대 역사학자 노먼 고다는 “아직도 많은 문서가 비밀인 상태”라며 “완전한 규모를 집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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