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과 갈등을 빚고 있는 러시아가 12일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장거리 전략 폭격기의 재배치 카드를 꺼내들었다. 미국과 옛소련이 핵무기로 서로의 목줄기를 겨눴던 냉전 시대 ‘공포의 균형’ 전략이 사실상 전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한층 커지게 됐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러시아 장거리 폭격기들이 러시아 국경과 북극해 상공을 비행할 것”이라며 “현 상황에서는 대서양 서부와 태평양 동부, 카리브해, 멕시코만에도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방의 영역인 대서양과 태평양은 물론, 미국의 턱밑인 카리브해와 멕시코만에도 장거리 폭격기들을 정규 배치하겠다는 얘기다.
러시아는 냉전 때 TU-95(사진) 등 전략 폭격기들을 대거 배치해 대서양과 태평양 전역을 초계비행 하도록 했지만, 냉전 붕괴 뒤 재정적 어려움 탓에 중단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발트해 등에서 일부 초계비행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사실상 냉전 때 규모로 전략 폭격기 투입을 증강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전략 폭격기들은 초계·정찰에도 활용되지만, 기본 임무는 공중에 떠 있다가 전쟁 결정과 동시에 핵미사일로 상대방 전략사령부와 핵 기지 등 핵심 전략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다.
앞서 올 초 쇼이구 장관은 러시아가 세계 곳곳에 군사력을 포진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며 알제리와 키프로스, 니카라과, 쿠바, 베네수엘라, 세이셸, 베트남 등의 항구를 러시아 해군 함정이 이용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7월엔 2001년 폐쇄됐던 쿠바 내 루르데스 감청 기지를 재가동하기로 러시아와 쿠바가 합의했다고 러시아 언론이 보도하기도 했다. 미국 해안에서 불과 250㎞ 떨어진 루르데스 기지에선 미 잠수함과 함정, 군용기, 위성 등의 신호정보를 속속들이 낚아챌 수 있다.
쇼이구의 ‘전략 폭격기 재배치’ 선언은 “러시아 전투병력과 장비가 친러 반군이 장악한 우크라이나 동부로 재진입했다”는 필립 브리들러브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 총사령관의 12일 성명과 거의 동시에 나왔다. 나토는 러시아가 반군으로 하여금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다시 전면전에 나서게 하려고 지원을 강화하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부인했다. 브리들러브 총사령관은 11일에도 “‘핵 능력’을 갖춘 러시아 부대가 지난 3월 러시아가 강제 합병한 크림반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유엔은 12일 브리들러브의 성명 발표 직후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했다.
러시아가 막대한 비용과 ‘냉전 부활’ 상황을 불사하면서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개입을 군사적으로 저지하려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배경을 놓고는, 실제 러시아가 느끼는 안보적 우려와 역내 패권을 향한 푸틴의 열망, 대외 강경책으로 인기를 끌어올리려는 국내정치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어떤 요인을 가장 앞에 둘지를 두고는 전문가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린다. 조슈아 시프린슨 텍사스대 조교수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토와 유럽연합(EU)이 지속적으로 옛소련권으로 팽창해온 터에 인접한 우크라이나마저 서방 영향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푸틴이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리언 에런 미국기업연구소(AEI) 러시아연구실장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는 경구에서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다”라며 “강경한 대외 정책과 패권 추구는 갈수록 푸틴 인기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해 국내 요인에 방점을 찍었다.
손원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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