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키르 마납.
[토요판] 커버스토리
아체 실권자, 무자키르 마납 아체당 대표
10년 전 쓰나미가 선물한 평화행진 10년
게릴라 출신 실세 무자키르 마납 인터뷰
아체 실권자, 무자키르 마납 아체당 대표
10년 전 쓰나미가 선물한 평화행진 10년
게릴라 출신 실세 무자키르 마납 인터뷰
아체는 지난해 12월26일 쓰나미 10주년을 맞았다. 인구 4%에 이르는 17만명이 목숨을 잃은 대재앙은 인도네시아에 정부에 맞서 독립을 외쳐왔던 자유아체운동과 정부군 사이의 29년 전쟁을 멈추게 하는 평화의 역설을 불러왔다. 그 휴전은 2005년 8월15일 두 진영이 아체 자치주 설치와 평화 정착 과정을 규정한 헬싱키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정부군 철수와 자유아체운동 무장해제로 이어졌고, 아체는 56년 만에 자치주 지위를 되찾았다. 그로부터 평화행진 10주년을 맞은 2015년 오늘 아체의 한복판에는 부지사이자 제1당(아체당) 대표인 무자키르 마납 자유아체운동 전 사령관이 있다. 세계가 산악 무장투쟁 혁명가의 도시 정치를 주목하는 가운데 그동안 인도네시아 언론뿐 아니라 국제 언론과도 거리를 두었던 무자키르 마납을 <한겨레>가 처음으로 단독 인터뷰했다. 위 사진은 1999년 12월 아체의 니삼 게릴라 기지에서 찍은 것으로 당시 <한겨레21>을 통해 무자키르 마납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2002년 1월 자유아체운동 전 사령관 압둘라 샤페이가 정부군에 살해당한 뒤 무자키르가 후임 사령관이 되자 인도네시아 정부군과 경찰은 인도네시아 시사주간지 <템포>에 실렸던 이 사진을 복사해서 제1호 지명수배 포스터를 만들기도 했다.
▶<한겨레>는 지난해 11월 말부터 두 번에 걸쳐 ‘정문태의 제3의 눈’을 통해 쓰나미 10주년을 맞은 아체의 실상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무자키르 마납 자유아체운동(GAM) 전 사령관을 통해 아체 평화 10년의 현실을 전합니다.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는 1990년대 초 언론접근 금지령이 떨어졌던 아체 군사작전지역(DOM)을 최초로 취재했을 뿐 아니라 2003년 아체계엄군사작전을 유일하게 취재했던 외신기자로, 국제사회와 언론의 사각지대였던 아체를 알리고자 애써왔습니다.
매일 투자자들과 강행군…총 없는 정치가 골치는 더 아파
“기꺼이 만날 것이다.” 선을 통해 답이 왔다. ‘당신이라면 언제든 좋다.’ 문자도 날아왔다. 그런데도 다른 기자들이 잘 믿질 않는다. “그이가 인터뷰한 적이 없는데” “그이가 기자들을 안 좋아해서”…. 직유든 은유든 결론은 인터뷰 못한다는 뜻이었다.
지난해 11월24일 저녁 그가 헤르메스호텔에서 열리는 인도네시아스포츠위원회에 얼굴을 내민다기에 그냥 찾아갔다. 행사 끝나고 그와 둘이 커피숍에 앉아 노닥거리는 걸 보면서도 기자들은 긴가민가했다. 11월26일 오전 자카르타에 다녀오던 그를 공항 귀빈실에서 만나 이야기 좀 나눈 걸 공보담당이 ‘한국 기자와 인터뷰하다’는 내용에다 사진까지 박아 기자들한테 보도용 이메일을 날리자 그제야 다들 고개들을 끄덕인 모양이다. 근데 그건 오보였다. 진짜 인터뷰는 12월7일 아체당(Aceh Party) 당사에서 했다. 하루건너 자카르타를 오가는데다 투자자들을 몰고 오지를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쁜 그가 나와의 인터뷰를 마다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썩 내켜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저 옛 인연에 못 이겨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무자키르 마납(Muzakir Manaf)이 그 주인공이다. 아체 독립을 외치며 산악에서 무장투쟁을 했던 자유아체운동(GAM) 전 사령관으로 지금은 아체 자치주 의회 제1당인 아체당 대표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치주 부지사를 하는 인물이다. 사람들은 아체 망명정부 외무장관 출신 주지사 자이니 압둘라(Zaini Abdullah)를 제쳐놓고 무자키르를 아체의 실권자라 여긴다. 그렇더라도 공식 직함 부지사쯤이 언론을 깔볼 수 있다는 건 뭔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뜻이고, 기자들이 그 부지사를 무서워하며 말도 잘 걸지 못한다는 건 어딘가 탈이 나 있다는 신호다.
여전히 수줍음 타는 전직 게릴라군 사령관
외신기자들은 직업상 어딜 가나 맨 먼저 언론판 돌아가는 꼴로 한 사회를 본다. 언론과 안 친하다는 무자키르, 첫날부터 심사가 복잡해졌다. 권력을 쥔 자가 언론을 피한다는 건 서울에서도 자카르타에서도 아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켕기는 게 많거나, 아는 게 없거나, 정치가 개판이거나. 보통 이런 자들이 독선적으로 치닫다가 결국 정치를 엉망으로 만드는 걸 25년 동안 국제정치판을 취재하면서 봐왔던 터이니.
헤르메스호텔 커피숍, 기자들도 사람들도 다 쳐다본다.
-이게 몇 년 만인가?
“잘 지냈나?”
-산사나이였는데 부지사 하는 걸 보니 대견스럽다.
“음…, (아주 겸연쩍어하며) 근데 갑자기 웬일인가?”
-하도 취재하기 어렵다고 소문 나서 한번 따라다녀 보려고. 인터뷰도 좀 하고.
“어디든 좋다. 와라. 내일 사방섬(반다아체 인근의 섬) 가는데 같이 가자. 비행기가 6인승이라 자리 날지 모르겠는데.”
무자키르는 공보담당을 불러 나를 소개했다. 통역을 해준 누르딘 하산(아에프페 기자)은 “늘 카리스마를 뿜었던 무자키르가 수줍어하는 걸 처음 봤다. 인터뷰도 받아주고, 너무 놀랐다”며 흥분했다. 놀란 건 나였다. 내가 봐온 무자키르는 늘 그랬으니. 1999년 12월 니삼 산악 게릴라 기지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몹시 수줍음을 탔다. 그때만 해도 외신기자를 처음 만났고 인터뷰란 걸 해본 적 없어서 그러려니 여겼다. 그 뒤 2005년 8월 아체 자치주 설치와 평화 실행안을 담은 헬싱키협정(Helsinki MoU) 서명에 따라 게릴라들이 하산하던 시절 만난 무자키르도 여전히 낯가림이 심했다. 그리고 9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부끄럼 타는 모습은 옛날 그대로였다. 나는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이 오히려 반가웠던 터다. 공항 귀빈실에서 외국 투자자를 대하던 무자키르 모습도 내 눈에는 낯가림으로 보였다. 스포츠위원회 연설 때도 그랬다. 아체 사람들은 그걸 카리스마로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무자키르가 청중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자키르가 언론을 좋아하지 않는 게 내성적인 성격 탓이라 여겼는데 기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얼추 짐작대로였다. “무자키르가 기자들과 말문을 트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게 문제다.” <아체 포스> 기자 유스와디 말마따나 현지 기자들은 저마다 무자키르의 비사교적인 성격을 나무랐다. 정작 무자키르는 “오해다.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기 싫어 확실한 말만 해왔다”고 대수롭잖게 여겼다. “무자키르가 언론을 공격하거나 기자들을 해코지한 적도 없다.” <인도시아르 티브이> 기자 야얀 잠자미의 말이나 “검열도 없고 탄압도 없다. 비판적인 기사도 날릴 수 있다”는 누르딘 하산 말에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자카르타에 본사를 둔 언론들과 달리 아체 현지 언론들은 눈치껏….” <메트로 티브이> 기자 자이날 바크리 말은 기자들이 알아서 긴다는 뜻이니 좀 달리 볼 만했다. 내가 무자키르의 언론관을 취재 화두로 뽑아들 만큼 중요하게 다룬 까닭은 무자키르를 처음 세상에 알렸던 기자로서 그가 잘못되면 내게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늘 따라다녔던 탓이다.
한국판 ‘불통’과는 좀 다르지만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정치인 무자키르가 살아온 걸 보면 아주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1964년 북부 아체 스느돈에서 태어난 무자키르는 어머니 주바이다 빈티 모하맛 하산의 말처럼 “어릴 때부터 말도 없고 냉정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1986년 리비아로 떠난 무자키르는 유명한 캠프 타주르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989년까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 경호대에서 근무했다. 1989년 아체로 되돌아온 뒤엔 곧장 자유아체운동 게릴라전선에 뛰어들어 2005년 도시로 내려올 때까지 15년 동안이나 험난한 산악을 누빈 인생이다. 타고난 떠버리가 아닌 다음에야 비밀을 생명처럼 여기는 대통령 경호대니 폐쇄적인 산악 무장투쟁 같은 특수한 경험을 한 20년쯤 하고도 인터뷰를 즐기며 주절거린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하나 본다. “아이가 스무살 땐가 인도네시아 정부군 하사관 시험을 봤어. 예나 이제나 징병관한테 뒷돈을 줘야 하는데 우리가 그럴 돈이 있나. 그래서 그만두고 말레이시아(사실은 리비아)로 떠났지.” 2005년 무자키르 어머니가 나한테 흘려준 말이다. 그렇게 인도네시아 정부군 징병 비리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 놓았고 결국 반군 우두머리를 키워내면서 아체 현대사를 돌려놓고 말았다. 아체 현대사의 감춰진 한 토막이다.
리비아로 떠나 군사훈련 받은 뒤
카다피 대통령 경호대에서 근무
1989년 아체 돌아와 2005년까지
산악 누비며 게릴라 투쟁 했던 그
지금은 아체당 대표, 아체주 부지사 2003년부터 정부군과 최악의 교전
게릴라 2000명, 정부군 500명 사망
쓰나미로 갑자기 찾아온 평화의 역설
2005년 헬싱키 협정, 정부군 철수
무자키르는 15년만에 산에서 내려왔다 지옥에서 조건 없는 휴전, 그리고 자치주 회복 무자키르는 2002년 1월 자유아체운동 사령관 압둘라 샤페이가 정부군과 교전 끝에 사망하자 그 자리를 물려받아 4000여명의 게릴라를 이끌기 시작했다. 무자키르한테는 곧장 시험이 닥쳤다. 2003년 5월19일 도쿄평화회담이 깨지자마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즉각 아체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아체운동 박멸작전에 돌입했다. 정부군은 해병과 특전사를 비롯한 중무장 특수전 병력 4만6675명을 아체에 투입해 1975년 동티모르 침공 뒤 최대 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 아체계엄군사작전에 해군은 전함 23대를 파견했고 공군은 국내 분쟁 투입이 금지된 F16 전폭기까지 띄워 입체작전을 펼쳤다. 무자키르는 “아체 자유를 위해 마지막 한 방울 피까지”를 외치며 항전했고 자유아체운동은 2000여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전투에서 정부군도 500여명 전사자를 내면서 29년 전쟁에서 양쪽 모두 가장 큰 희생자를 기록했다. 이미 정치인으로 변신한 무자키르를 지금도 아체 사람들이 사령관을 일컫는 “무알럼”이라 부르는 건 그날의 항전을 기리는 훈장인 셈이다. 아체계엄군사작전이 지쳐가던 2004년 12월26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다. 쓰나미가 덮쳤다. 그 파도 한방은 아체 인구의 4%에 가까운 17만명을 삼켰고 10%에 이르는 40만명의 이재민을 냈다. 주검으로 뒤덮인 그 땅에서 누구도 더 이상 전쟁을 생각할 수 없었다. 지옥을 본 정부군과 자유아체운동은 곧장 조건 없는 휴전을 선언했다. “평화를 원했다기보다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탓이다.” 무자키르 말마따나 쓰나미 직전 이미 막대한 화력과 병력을 동원했던 정부군은 재정 파탄에 이르렀고 장기 군사작전으로 전의를 상실해가던 상태였다. 벼랑 끝에 몰렸던 건 자유아체운동도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두 진영이 출구를 찾고 있던 무렵 쓰나미가 덮쳤다.
-아체 평화가 ‘쓰나미의 선물’이라 부를 만하나?
“쓰나미가 다는 아니었지만 평화를 앞당긴 건 맞다. 쓰나미 두 달 전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을 만나 평화를 중재할 제3세력을 요청했는데, 결국 그게 쓰나미였다.”
-쓰나미가 없었다면 아직 싸우고 있을까?
“(한참 뜸들이다가) 우리가 손들지 않았을 건 분명하다. 정부군은 재원도 바닥났고 크게 지쳐 있었으니 그쪽이 먼저….”
-자유아체운동도 마찬가지였잖아. 보급불능상태였는데.
“당신이 취재했으니 잘 알겠지만 정부군이 우리한테 총과 실탄을 팔아먹을 정도였잖아. 우린 괜찮았다. 사기도 높았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무렵 정부군이 자유아체운동한테 무기를 팔아먹다 심심찮게 잡히곤 했으니. 어쨌든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 2005년 8월15일 두 진영은 헬싱키협정에 서명했고 정부군 철수와 자유아체운동 무장해제가 뒤를 이었다. 9월 들어 게릴라들이 하산했고 무자키르도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날 록스마웨에서 만났던 무자키르는 “인도네시아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언제든 다시 산으로 되돌아갈 준비가 돼 있다. 무기는 얼마든지 있다”며 여전히 평화적 상황을 초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말썽 많던 아체통치법(LoGA)이 결국 2006년 8월 인도네시아 의회를 통과하면서 1950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의 변절(아체를 수마트라주에 편입시킨 결정) 뒤 56년 만에 아체는 마침내 자치주 지위를 되찾았다. 아체 자치주는 국방·외교·통화를 제외한 모든 분야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현재 아체통치법의 완전한 실행을 위해 자카르타 중앙정부와 아체 자치주가 협상하고 있다.
무자키르는 그해 12월 주지사 선거에서 독립후보로 나선 자유아체운동 출신 이르완디 유숩(Irwandi Yusuf)을 지원하면서 정치판에 첫발을 담갔다. 2007년 무자키르는 자유아체운동을 아체당으로 바꿔 2009년 주의회 선거에서 69석 가운데 33석을 차지하며 제1당 자리를 잡았다. 산악 게릴라에서 도시 정치인으로 변신한 2년짜리 풋내기가 거둔 승리치고는 엄청났다. 이어 2012년 주지사 선거에서 아체당 후보로 나선 자이니-무자키르 조는 이르완디한테 압승을 거둬 현재 제2기 아체 자치주를 이끌고 있다. 무자키르는 비록 2014년 4월 주의회 선거에서 아체당이 81석 가운데 29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여전히 제1당 대표로서 정부와 의회를 주무르고 있다.
“해수를 식수로”…작년과 재작년 한국 둘러봐
-산악 게릴라 사령관과 도시 정치인 가운데 어느 게 더 어려운가?
“장소 빼곤 다를 바 없다. 산에선 몸이 필요했다면 도시에선 머리가 좀 더 중요하고.”
-투쟁으로 보면?
“산보다는 도시가 효과적인 것 같고.”
말은 가볍게 받았지만 얼굴은 찌푸렸다. 정치가 더 골치 아프다는 뜻이었다. 효과적인 도시투쟁인진 몰라도 무자키르는 지난번 선거 때 ‘가구당 월 100만루피아(10만원쯤) 지원’ ‘전쟁고아 지원’같이 돈 들어가는 공약들을 엄청나게 쏟아냈다. 그걸 메우려니 하루가 멀다 하고 투자자들을 만나고 다닌다.
“아, 그날 자카르타에서 데려왔던 그 독일 투자자들은 보석, 커피, 가스, 오일에 관심 있다기에….”
-한국도 다녀왔다면서 신통찮았던 모양이지?
“작년, 재작년 두 번. 정수설비 관심 있었는데 못 보고 태양열 쪽만.”
-그쪽은 왜?
“쓰나미 피해 지역에 식수, 전기 보내는 게 급해서. 아직 전기는 50%, 식수는 20%밖에.”
그래서 무자키르는 요즘 ‘해수를 식수로’ 만드는 것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근데 아직 아체에 쓸 만한 투자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새로운 땅으로 알려지면 별별 사람들이 별소리를 다 하며 달라붙는데 지금 아체가 딱 그 짝 아닌가 싶다.
-투자자들이 치안과 샤리아(이슬람율법)가 겁나서 머뭇거릴 수도?
“당신이 지금 여기 있잖아. 치안 문제 있나? 샤리아 때문에 불편한가? 대답해봐라.”
-나야 투자자도 아니고 늘 이런 데 다니는 게 팔자니 문제될 것도 없지만.
“외국 관광객들이 여기 사방에서는 비키니 입고 수영들 한다. 샤리아 탓한다는 소리 못 들었다. 샤리아는 아체 사람들, 무슬림을 위한 법일 뿐이다.”
무자키르는 그동안 바깥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답답하고 억울한 게 많았던 모양이다. 경제학자 나자무딘(시아 쿠알라대학 경제학)은 “1기 이르완디 정부는 쓰나미 복구자금이 있었다. 행운이었다. 2기 무자키르 정부는 그마저도 없다. 무자키르한테 시간을 좀 더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르완디 때는 45억달러로 추산했던 쓰나미 피해에 자카르타 중앙정부와 국제사회가 65억달러를 기부하면서 한때 새로 지은 집이 들어갈 사람보다 많고 배가 어부보다 많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그렇다고 바쁜 시민이 무자키르를 얼마나 더 기다려 줄지는 의문이다. 호사가들은 차차기 선거쯤이면 무자키르의 아체당이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대는 판이니.
2주 취재 동안 무자키르를 네 번 만났는데 그는 늘 피곤에 절어 있었다. 정치분석가 아르디안샤는 “자카르타 정부와 관계, 분파주의, 샤리아 실행 방법, 부정부패, 관료주의가 무자키르 발목을 잡은 탓”이라고 진단했다. 옳은 소린데 대안이 없다. 공무원들은 다 자카르타 중앙정부 아래서 일해온 이들이고, 부정부패는 인도네시아 특산품이고, 샤리아는 잔챙이들만 가두는 법이라고 난리들이니.
게다가 자치정부를 향한 시민들 바람은 독립에 버금갈 만큼 커져버렸지만 현실은 여전히 자카르타 중앙정부에 가로막혀 만만치가 않다. 스포츠위원회 개회식 때 자카르타에서 온 대표들과 아체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인도네시아라야(국가)를 불렀다. 무자키르는 아주 어색한 표정으로 가끔 입만 뻥긋거렸다. 아프지만 그게 정직한 아체 현실이다. 무자키르는 자카르타 중앙정부와 맞선 최전선에 선 협상 최고책임자로서 변명도 핑계도 댈 수 없는 처지다.
-요즘 200마일 해저유전을 놓고 자카르타와 분배(지상과 해상 12마일까지는 아체 70%, 자카르타 30%로 합의) 문제로 말들이 많던데?
“잘 풀려가고 있다.”
인터뷰에서 짧게 끊어 치는 대답은 대개 일이 꼬여 골치 아프다는 뜻이다.
-그러면 아체주 깃발(자유아체운동 깃발과 빼닮은)은 올릴 건가? 2013년 유도요노 전 대통령이 전쟁 들먹이며 펄쩍 뛰었는데.
“깃발은 얼마 전 자카르타도 인정했다. 올해(2014년) 말까지 아체통치법 실행 약속도 했고.”
-인정했으면 지금 깃발 올릴 수 있겠네?
“아직은. 좀 기다려야 해. 이 깃발 건은 오프 더 레코드로 가자.”
무자키르는 선을 그었다. 그러겠다고 약속도 안 했지만 12월 중순 자카르타 부통령실 사람들을 만났을 때 깃발 색깔을 바꾸는 선에서 타협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굳이 감춰주고 말고 할 일도 없게 됐다.
그는 이제 산 대신 도시에서 싸운다
‘가구당 월 100만루피아 지원’ 같은
공약들을 지난번 선거 때 쏟아냈고
그 말들을 책임지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투자자를 만난다 29년 전쟁에다 쓰나미에다
게릴라 습성 못 버린 풋내기 정부
무자키르는 오판할 수도 있다
아체 사람들은 무자키르가 두렵다
오늘 아체는 무자키르 손에 달렸다 망명정부 꾸려온 76세대와의 갈등 중년 티가 얼굴에 밴 무자키르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나는 늘 기억 속의 그 무자키르를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1999년 12월 니삼 산악 게릴라 기지였다. 그의 눈은 아기처럼 맑았다. 그 눈엔 자유니 독립 투쟁 의지만 담겼지 오물이 없었다. 그는 첫 만남인데도 속을 다 드러냈다. “스웨덴 쪽 망명정부와 우린 다르다. 정치와 무장투쟁도 다르다. 우린 우리 길을 간다.” 가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제 언론은 아체 무장조직이 망명정부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던 시절이다. 그날 무자키르를 통해 처음으로 그 둘이 일방적인 명령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선에서 게릴라가 바깥사람, 그것도 외신기자한테 상위 정치조직을 비판할 수 있다는 건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자키르의 가능성을 알아봤고 뿔뿔이 갈려 있던 게릴라 속을 파보았다. 샤페이 사령관이 살해당하기 2년 전인 1999년 12월 <한겨레21>이 ‘자유아체운동 차기 사령관 무자키르를 주목하라’는 제목을 뽑아들고 도박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꼭 15년 전 산에서 무자키르가 했던 그 기억 속의 말들은 오늘 반다아체의 현실이다. 주지사 자이니와 부지사 무자키르가 삐거덕대는 건 이미 동네사람들 입길에도 올랐다. -둘이 왜 싸우나? “남들 말 듣지 마라. 우린 아무 문제없다.” -없기는 지난 8월 페르타아룬 가스 사업권 놓고 둘이 부딪쳐 지금껏 계약도 못 하는 판인데? “(웃으면서) 76세대들(1976년 자유아체운동을 창설한 하산 티로와 함께 망명정부를 꾸려온 이들) 생각이 우리와 다르다.” -어떻게? “좀 유치하고…, 그만하자.” -당신 정부를 뒤에서 조종해 온 말릭 마뭇(전 망명정부 총리)도? “(손사래를 치며) 조종은 무슨. 말릭은 경륜도 있고 좋은데 그 주변이….” 세대 간 갈등은 1999년 그 산에서 무자키르가 일찌감치 정점을 찍었다. “총도 먹을거리도 지원 못하는 정치가 무슨 정치냐. 망명정부 사람들은 스웨덴에서 잘 먹고 잘 살잖아.” 망명정부와의 갈등은 2002년 말부터 6개월짜리 휴전 때 무자키르가 “투쟁은 아체에서 한다. 무장투쟁은 망명정부와 상관없다”고 대놓고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불거졌다. 그때부터 76세대들 사이에는 “우리가 무자키르 같은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웠다”는 말이 나돌았다. 기득권을 놓기 싫다는 좀 질 낮은 표현인 셈이다. 무자키르에 비판적인 정치분석가 아르디안샤 같은 이들마저 “떠날 때가 됐다. 76세대들은 이미 칠팔십 넘었다. 아체에서 목숨 바쳐 싸웠던 젊은 세대들한테 넘기는 게 옳다”며 76세대가 자처하는 그림자 노릇을 타박했다. 혁명주체의 정치는 성공할 것인가 이리 파고 저리 파 봐도 오늘 무자키르의 팔자를 똑 부러지게 가름하긴 힘들다. 아체 현대사가 낳은 영웅인지 장애물인지 아직은 또렷지 않다. 이건 독립을 꿈꾸었던 자유아체운동이 자치라는 반쪽짜리 혁명에 성공하고부터 부딪힌 역사의 고민이기도 하다. ‘혁명 뒤 누가 정치를 해야 옳은가?’ 무자키르는 지금 이 해묵은 주제를 들고 심판대에 올라 있다. 답은 간단하다. 마땅히 목숨 바쳐 혁명했고 그 혁명정신을 구현할 혁명주체가 정치를 하는 게 역사의 진행 방향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반동이었다. 오늘 아체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혁명 결과를 놓고 지역과 계급이 또렷한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무장투쟁 요새였던 동부를 비롯한 산악지역에서는 무자키르가 폭발적 인기를 누리지만 도시 중산층이 모인 반다아체 같은 곳에서는 맥도 못 추는 걸 보면. 오늘 분명한 건 아체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이다. 아체엔 두려움이 몸에 밴 사람들이 살고 있다. 29년 전쟁에다 쓰나미에다 또 아직껏 게릴라 습성을 못 버린 풋내기 정부와 마주쳐 있는 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정치가 오판할 조건을 갖췄고 무자키르가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아체 사람들은 무자키르를 좋다 싫다 하기보다는 무서워하는 분위기다. 아직은 아체 평화를 말하기 힘든 까닭이다. 다만 아체의 운명이 앞으로도 한동안 무자키르 손에 들린 것만큼은 틀림없다. 무자키르를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이다. 아체 평화 행진 10년째 아체를 찾은 이유다. 반다아체/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지난해 12월7일 아체의 주도 반다아체의 아체당 당사에서 만난 아체당 대표이자 아체주 부지사 무자키르 마납. 게릴라 사령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지만 그 특유의 낯가림은 여전히 심했다. 정문태
아체당 대표 무자키르 마납(오른쪽)은 201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이자 특전사 코파수스 전 사령관이었던 프라보워 수비안토(왼쪽)와 손을 잡아 큰 논란을 일으켰다. 프라보워는 동티모르와 아체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내 분리 분쟁 과정에서 학살자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2014년 3월12일의 아체지역 대통령 선거 현장. 아디
카다피 대통령 경호대에서 근무
1989년 아체 돌아와 2005년까지
산악 누비며 게릴라 투쟁 했던 그
지금은 아체당 대표, 아체주 부지사 2003년부터 정부군과 최악의 교전
게릴라 2000명, 정부군 500명 사망
쓰나미로 갑자기 찾아온 평화의 역설
2005년 헬싱키 협정, 정부군 철수
무자키르는 15년만에 산에서 내려왔다 지옥에서 조건 없는 휴전, 그리고 자치주 회복 무자키르는 2002년 1월 자유아체운동 사령관 압둘라 샤페이가 정부군과 교전 끝에 사망하자 그 자리를 물려받아 4000여명의 게릴라를 이끌기 시작했다. 무자키르한테는 곧장 시험이 닥쳤다. 2003년 5월19일 도쿄평화회담이 깨지자마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즉각 아체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아체운동 박멸작전에 돌입했다. 정부군은 해병과 특전사를 비롯한 중무장 특수전 병력 4만6675명을 아체에 투입해 1975년 동티모르 침공 뒤 최대 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 아체계엄군사작전에 해군은 전함 23대를 파견했고 공군은 국내 분쟁 투입이 금지된 F16 전폭기까지 띄워 입체작전을 펼쳤다. 무자키르는 “아체 자유를 위해 마지막 한 방울 피까지”를 외치며 항전했고 자유아체운동은 2000여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전투에서 정부군도 500여명 전사자를 내면서 29년 전쟁에서 양쪽 모두 가장 큰 희생자를 기록했다. 이미 정치인으로 변신한 무자키르를 지금도 아체 사람들이 사령관을 일컫는 “무알럼”이라 부르는 건 그날의 항전을 기리는 훈장인 셈이다. 아체계엄군사작전이 지쳐가던 2004년 12월26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다. 쓰나미가 덮쳤다. 그 파도 한방은 아체 인구의 4%에 가까운 17만명을 삼켰고 10%에 이르는 40만명의 이재민을 냈다. 주검으로 뒤덮인 그 땅에서 누구도 더 이상 전쟁을 생각할 수 없었다. 지옥을 본 정부군과 자유아체운동은 곧장 조건 없는 휴전을 선언했다. “평화를 원했다기보다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탓이다.” 무자키르 말마따나 쓰나미 직전 이미 막대한 화력과 병력을 동원했던 정부군은 재정 파탄에 이르렀고 장기 군사작전으로 전의를 상실해가던 상태였다. 벼랑 끝에 몰렸던 건 자유아체운동도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두 진영이 출구를 찾고 있던 무렵 쓰나미가 덮쳤다.
‘가구당 월 100만루피아 지원’ 같은
공약들을 지난번 선거 때 쏟아냈고
그 말들을 책임지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투자자를 만난다 29년 전쟁에다 쓰나미에다
게릴라 습성 못 버린 풋내기 정부
무자키르는 오판할 수도 있다
아체 사람들은 무자키르가 두렵다
오늘 아체는 무자키르 손에 달렸다 망명정부 꾸려온 76세대와의 갈등 중년 티가 얼굴에 밴 무자키르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나는 늘 기억 속의 그 무자키르를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1999년 12월 니삼 산악 게릴라 기지였다. 그의 눈은 아기처럼 맑았다. 그 눈엔 자유니 독립 투쟁 의지만 담겼지 오물이 없었다. 그는 첫 만남인데도 속을 다 드러냈다. “스웨덴 쪽 망명정부와 우린 다르다. 정치와 무장투쟁도 다르다. 우린 우리 길을 간다.” 가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제 언론은 아체 무장조직이 망명정부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던 시절이다. 그날 무자키르를 통해 처음으로 그 둘이 일방적인 명령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선에서 게릴라가 바깥사람, 그것도 외신기자한테 상위 정치조직을 비판할 수 있다는 건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자키르의 가능성을 알아봤고 뿔뿔이 갈려 있던 게릴라 속을 파보았다. 샤페이 사령관이 살해당하기 2년 전인 1999년 12월 <한겨레21>이 ‘자유아체운동 차기 사령관 무자키르를 주목하라’는 제목을 뽑아들고 도박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꼭 15년 전 산에서 무자키르가 했던 그 기억 속의 말들은 오늘 반다아체의 현실이다. 주지사 자이니와 부지사 무자키르가 삐거덕대는 건 이미 동네사람들 입길에도 올랐다. -둘이 왜 싸우나? “남들 말 듣지 마라. 우린 아무 문제없다.” -없기는 지난 8월 페르타아룬 가스 사업권 놓고 둘이 부딪쳐 지금껏 계약도 못 하는 판인데? “(웃으면서) 76세대들(1976년 자유아체운동을 창설한 하산 티로와 함께 망명정부를 꾸려온 이들) 생각이 우리와 다르다.” -어떻게? “좀 유치하고…, 그만하자.” -당신 정부를 뒤에서 조종해 온 말릭 마뭇(전 망명정부 총리)도? “(손사래를 치며) 조종은 무슨. 말릭은 경륜도 있고 좋은데 그 주변이….” 세대 간 갈등은 1999년 그 산에서 무자키르가 일찌감치 정점을 찍었다. “총도 먹을거리도 지원 못하는 정치가 무슨 정치냐. 망명정부 사람들은 스웨덴에서 잘 먹고 잘 살잖아.” 망명정부와의 갈등은 2002년 말부터 6개월짜리 휴전 때 무자키르가 “투쟁은 아체에서 한다. 무장투쟁은 망명정부와 상관없다”고 대놓고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불거졌다. 그때부터 76세대들 사이에는 “우리가 무자키르 같은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웠다”는 말이 나돌았다. 기득권을 놓기 싫다는 좀 질 낮은 표현인 셈이다. 무자키르에 비판적인 정치분석가 아르디안샤 같은 이들마저 “떠날 때가 됐다. 76세대들은 이미 칠팔십 넘었다. 아체에서 목숨 바쳐 싸웠던 젊은 세대들한테 넘기는 게 옳다”며 76세대가 자처하는 그림자 노릇을 타박했다. 혁명주체의 정치는 성공할 것인가 이리 파고 저리 파 봐도 오늘 무자키르의 팔자를 똑 부러지게 가름하긴 힘들다. 아체 현대사가 낳은 영웅인지 장애물인지 아직은 또렷지 않다. 이건 독립을 꿈꾸었던 자유아체운동이 자치라는 반쪽짜리 혁명에 성공하고부터 부딪힌 역사의 고민이기도 하다. ‘혁명 뒤 누가 정치를 해야 옳은가?’ 무자키르는 지금 이 해묵은 주제를 들고 심판대에 올라 있다. 답은 간단하다. 마땅히 목숨 바쳐 혁명했고 그 혁명정신을 구현할 혁명주체가 정치를 하는 게 역사의 진행 방향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반동이었다. 오늘 아체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혁명 결과를 놓고 지역과 계급이 또렷한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무장투쟁 요새였던 동부를 비롯한 산악지역에서는 무자키르가 폭발적 인기를 누리지만 도시 중산층이 모인 반다아체 같은 곳에서는 맥도 못 추는 걸 보면. 오늘 분명한 건 아체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이다. 아체엔 두려움이 몸에 밴 사람들이 살고 있다. 29년 전쟁에다 쓰나미에다 또 아직껏 게릴라 습성을 못 버린 풋내기 정부와 마주쳐 있는 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정치가 오판할 조건을 갖췄고 무자키르가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아체 사람들은 무자키르를 좋다 싫다 하기보다는 무서워하는 분위기다. 아직은 아체 평화를 말하기 힘든 까닭이다. 다만 아체의 운명이 앞으로도 한동안 무자키르 손에 들린 것만큼은 틀림없다. 무자키르를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이다. 아체 평화 행진 10년째 아체를 찾은 이유다. 반다아체/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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