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는 우리나라에서 지구 정반대편(대척점)에 있다. 한반도와 비슷한 면적으로, 남미에서 두번째로 작은 나라다. 전체 344만명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이 나라의 유일한 대도시인 수도 몬테비데오와 주변 해안지역에 모여 산다.
독립광장과 대통령궁이 있는 도심에서 차로 30분가량 북쪽으로 달리면 아기자기한 남유럽풍 거리 대신 낙후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몬테비데오 외곽 카사바셰 마을도 그런 곳이다.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은 비영리단체(NPO) ‘악시온 프로모시오날 디에시오초 데 훌리오’는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말로는 ‘행동촉진 7월18일’이다. 단체 이름의 날짜는 우루과이 공화국이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선포(1830년)한 직후 전쟁과 혼란을 딛고 5년 만에 국가의 기초를 세운 제헌절이다.
지난달 24일 낮(현지시각) 찾아간 악시온의 사무동은 소박한 1층 건물이었다. 동네 주민들은 복잡하고 긴 이 단체의 이름을 사무동 건물의 모양을 본떠 ‘카바냐’(오두막집)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이 지역은 20여년 전만 해도 도시의 생활 폐기물이 모여드는 쓰레기장과 하수처리장이 있던 곳이다. 악시온의 프로그램 책임자 호르헤 아레나스는 “1970년대에 도시가 확장되고 도로가 생기면서, 변두리 주민들이 외곽으로 더 밀려나 빈민가를 이뤘다”고 말했다.
악시온은 여성(양성평등과 기회균등), 아동·청소년(기초교육), 지역개발(의료·보육·정보화), 사회적 일자리(직업교육), 농촌 개발 등 5개 부문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사회개발의 한 축을 맡고 있다. 상당수 프로그램은 지방정부의 개발정책과 연계돼 재정지원을 받는다.
악시온은 중앙·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손을 맞잡고 빈곤 퇴치와 지역개발, 소득격차 줄이기를 추구하는 우루과이식 경제발전 모델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그 핵심 개념이 ‘사회적 포용’이다. 최근 세계은행, 세계경제포럼을 비롯해 국제사회가 극심한 소득 불평등과 착취형 성장 모델을 극복할 대안으로 주목하는 ‘포용적 성장’과도 비슷하다. 경제개발과 분배의 전 과정에서 인종과 국적, 성별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의 사회적 참여와 통합을 중시한다.
악시온의 사무동 뒤편으로는 작고 허름한 창고 같은 부속건물 여러 동이 달려 있다. 컨테이너 건물을 연상케 하는 이곳들은 저마다 다양한 직업교육 시설과 작업장으로 쓰인다. 맨 먼저 만난 창고형 건물엔 농기구와 모터 펌프, 고무호스 같은 장비들이 있었고, 10~20대 젊은이 네댓명이 빗자루로 바닥을 쓸거나 공구를 만지고 있었다.
이 작업장 옆으로는 미용 교육실, 컴퓨터 교육실, 교사 회의실 등으로 나눠진 건물이 있다. 미용 교육실에는 앳된 얼굴의 여성들이 실습을 하고 있었고, 컴퓨터 교육실에도 10여명의 젊은이들이 한참 수업 중이었다. 이 건물을 지나면 버려진 기차 객차 한 칸을 개조해 꾸민 마을 독서실이 눈길을 끈다. 양쪽 벽에 세워진 책장엔 책과 자료가 빼곡하다. ‘기차 독서실’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 야구모자를 돌려쓴 채 한 청소년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기차 독서실 옆 텃밭에선 10대 여자 청소년 한 명이 장에 내다 팔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초겨울로 접어들어 설치한 맞은편 비닐하우스에는 채소류가 자라고 있었고, 관상용 화초를 재배하는 화분들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악시온은 가난한 동네에서 교육과 취업은커녕 삶의 목표도 없이 지내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교육과 직업훈련을 제공한다. 수강생들은 1년 과정으로 모집한다. 12~18살 청소년에게는 초·중등 기초과정과 컴퓨터 교육, 18~21살 젊은이들에겐 취업과 창업을 위한 일자리 교육을 한다. 매년 연평균 수료 인원은 교육 부문 30여명, 일자리 부문 120명 안팎이다.
일자리 교육은 직업실습생 과정의 ‘인턴십’ 방식으로 운영되는 게 독특하다. 원예반의 경우 야채나 관상용 화초 재배법을 배우고, 직접 기른 작물을 장에 내다 판다. 매출 수입은 악시온에 귀속되지만, 대신 수강생은 일정액의 급여를 받는다. 조경, 미장, 도배, 하수 정비, 청소 대행 같은 다른 직업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초보 일꾼인 인턴들의 벌이가 크지 않고 단체의 목적이 영리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어서 수익성 개념은 아예 없다. 오히려 늘 돈이 부족한 편이어서 시 정부와 프로그램 계약을 맺고 재정 지원을 받는다. 프로그램 책임자 호르헤 아레나스는 “일자리 교육은 참여자가 용돈도 벌고 경제활동의 경험도 쌓으며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자립의 첫 단계”라고 설명했다.
악시온이 지역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한 건 1990년대 초반부터다. 의사 출신의 타바레 바스케스(76) 현 대통령이 좌파정당 연합인 광역전선 후보로 처음 정계에 입문해 몬테비데오 시장으로 있을 때다. 처음부터 사업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아레나스는 “이곳을 찾아오는 10대 대부분이 처음엔 마약과 절도 같은 일탈에도 죄의식을 못 느끼는 무감각한 ‘불량 청소년’들이어서 난민 수용소 같은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이웃 주민들의 눈총도 따가웠다. “이 지역 출신 아이들은 초등학교도 못 마치는 경우가 많고, 삶의 역할 모델이 없었습니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 평생 동네 바깥을 나가본 적도 없었지요.”
그런 10대 아이들이 악시온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성실하게 일을 배우고, 과정을 수료한 뒤엔 일자리를 얻어 시민사회에 합류하거나 단체에 남아 같은 처지의 또래들을 가르쳤다. 주민들의 인식과 마을 분위기도 바뀌어갔다. 가장 큰 성과를 묻는 질문에 아레나스는 “이전엔 사람들이 빈민촌이자 범죄 위험지역으로 인식된 이 지역 출신의 고용을 꺼려 실업과 빈곤과 저교육이 대물림됐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이 일자리를 얻으면서 그런 악순환이 끊어지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인턴십 프로그램은 빈곤층 청소년들로 하여금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했고, 또 그들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취업 기회를 높여주었습니다.”
우루과이에선 군부독재 정부가 문민정부로 바뀐 이후인 1990년에 의사 출신의 타바레 바스케스 현 대통령이 좌파정당연합인 광역전선 후보로 몬테비데오 시장에 당선하면서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간 협력 모델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이런 시스템은 남아메리카 국가들을 강타한 경제위기 직후인 2005년 바스케스 현 대통령이 우루과이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 정부 시대를 열면서 더 확고해졌다. 우루과이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며, 재선은 가능하나 연임은 할 수 없다. 2010~2014년에는 역시 광역전선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이 집권했고, 2014년 12월 대선에서 바스케스가 재선에 성공했다.
앞서 2005년 첫 좌파 정부인 바스케스 1기 정부는 사회개발부를 신설했다. 빈곤 퇴치를 위한 사회활동가들의 사업 방식을 재조명하고 정부 차원에서 활용해보자는 구상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런 기대가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아레나스는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사회정책 수립에) 필요한 정보들을 갖고 있고, 정부는 시민단체들이 필요한 것(행정·재정적 지원 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시민사회의 결합이 효율적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악시온의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제니퍼(24)는 5년 전 우루과이 남부 해안도시 말도나도에서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자리를 구하러 몬테비데오로 왔다. “악시온의 원예 인턴십 프로그램을 마친 뒤 지금은 원예교육 그룹장으로 4년째 일하고 있어요. 인턴 학생들에게 식물재배 이론과 실습을 가르치는 게 주 업무예요.”
제니퍼에게 빈곤지역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기분이 어떤지 물어봤다. “아이들이 처음 왔을 때엔 낯설고 모르는 것투성이라 많이 서툴죠. 하지만 그들이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고 바뀌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아레나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제니퍼가 (또래보다) 작고 가냘퍼 보이지만 직접 트럭을 운전하며 학생들이 가꾼 작물을 싣고 장에 팔러 나가거나 단체에 필요한 물품을 사오는 등 살림꾼 역할을 척척 해냅니다.”
몬테비데오/글·사진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