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바티칸 교황 관저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바티칸/EPA 연합뉴스
짧은 만남으로 앙금이 가셨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마침내’ 24일 바티칸에서 만났다. 중동과 유럽을 순방중인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30분께 바티칸의 교황 관저인 사도궁전을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30분간 환담했다.
접견 장소로 들어선 트럼프 대통령은 악수 뒤 “아주 큰 영광”이라며 몸을 낮췄다. 트럼프는 시종 웃는 모습이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얼굴에서는 희미한 미소와 굳은 표정이 교차했다. <로이터> 통신은 비공개 환담 뒤 교황이 평화와 화해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를 새긴 메달을 건네며 “대통령께서 평화를 건설하는 올리브나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교황은 또 “비폭력-평화를 위한 정치 방식”이라는 제목의 자신의 메시지 자료와 함께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강조한 2015년 회칙 자료도 선물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평화를 이용할 수 있다”며, 교황이 준 자료를 “읽어보겠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별하게 제책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저서들을 답례품으로 건넸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킹 목사의 가르침을 주제로 교황과 환담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헤어지면서 “교황께서 한 말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교황청은 이날 낸 성명에서 두 사람이 “생명과 종교 및 양심의 자유를 위해 함께 헌신하기로 했다”며 “미국 가톨릭교회와 정부가 보건과 교육, 이민자 조력 문제에서 평화롭게 협력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만남에 더욱 관심을 가게 만든 배경에는 그동안 냉랭했던 관계가 있다. 지난해 초 공화당 대선 후보군에 오른 트럼프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멕시코장벽을 건설하고 무슬림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쫓아내겠다고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디서나 다리가 아니라 오로지 벽을 만들려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트럼프는 발끈하며 “이슬람국가가 궁극적 전리품으로 여기는 바티칸을 공격하면, 교황은 ‘트럼프가 대통령이라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 텐데…’ 라며 기도할 것”이라고 트위터로 응수했다. 교황이 “부끄러운” 발언을 했다고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정치인인 미국 대통령과 가장 영향력이 큰 영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교황의 갈등은 ‘노선 대립’으로도 볼 수 있다. 교황은 이민과 난민, 기후변화, 종교 간 대립 문제에 대해 인도적이고 진보적인 해법을 설파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 반대편에 서 왔다. 트럼프의 최측근으로 ‘가톨릭 우파’인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교황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보도도 나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국제적 문제를 놓고 교황과 궁합을 과시한 것과는 딴판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온 가족이 공항으로 영접을 나갈 정도로 교황에게 깍듯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애초 교황청을 방문하지는 않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교황을 무시한다는 뒷말이 나올까봐 단 30분짜리 면담 시간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열리는 벨기에 브뤼셀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일정인데, 브뤼셀 가는 길에 짬을 낸 셈이다.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성베드로광장에서 일반인 알현 행사에 참석하는 교황이 이처럼 이른 시간에 외빈 접견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번 만남의 성사에는 슬로베니아 태생으로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의 ‘영향력’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와 멜라니아는 검은색 베일을 쓰고 교황을 접견했다. 교황은 멜라니아에게 “남편한테 먹을 것으로 뭘 줬나요? 포티차(이탈리아식 빵)?”라고 다정하게 묻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 일행은 교황을 만난 뒤 <천지창조> 등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로 유명한 시스티나 소성당을 둘러봤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