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26일 빠르고 정확한 판단으로 옛소련 컴퓨터 시스템 오작동으로 인한 핵전쟁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남자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사진출처: AP 연합뉴스
냉전 시절 핵전쟁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남자’가 세상과 조용히 작별했다. 옛 소련 중령 출신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지난 5월19일 모스크바 외곽에서 77살로 숨졌으나 최근에서야 궂긴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1983년 9월26일 페트로프 중령은 ‘세르푸호프-15’로 불리던 관제센터에 앉아 발사 버튼이 있는 붉은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스크린에 핵미사일이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잠시 뒤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고, 네 발의 미사일이 추가로 날아왔다. 규정대로라면 당장 사령관에게 미국의 미사일 공격을 보고해야 했다.
적색경보가 울리기 3주 전인 1983년 9월1일, 소련은 미국 정찰기로 오인해 승객 269명이 탄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시켰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당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다.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은 미국이 핵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이 핵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고 판단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페트로프가 ‘기계적으로’ 상부에 경보 사실을 보고했더라면 러시아의 대응 공격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될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페트로프는 단지 ‘직감’으로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판단했다. 다른 레이더가 미사일을 감지하지 못했고, 만일 미국이 공격을 개시한다면 미사일 다섯 발이 아니라 수백발을 쏠 것도 같았다. 120명의 동료가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서 페트로프는 모두 자리로 돌아가 경고를 무시하라고 말했다. 그는 군 지휘부 책임자한테 ‘조기경보 시스템 오작동’이라고 보고했다. 그는 2013년 <비비시>(BBC) 인터뷰에서 “23분 뒤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만일 진짜 공격이 있었다면, 그때 이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안도했다”고 말했다. 그날 그는 모스크바에서 100㎞ 떨어진 숲 속 벙커에서 “컴퓨터보다 현명한”(2010년 <슈피겔> 인터뷰) 인간의 판단력을 바탕으로 인류를 핵전쟁 위기에서 구해냈다.
페트로프의 판단대로 경보는 시스템 오류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컴퓨터가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을 미국이 발사한 미사일 엔진 구름으로 오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련 군부는 페트로프를 치하하는 대신 그날 일지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며 군에서 쫓아냈다. 페트로프 역시 아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채 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업적은 1998년 유리 보틴체프 전 소련 미사일방어 사령관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페트로프는 2006년 유엔 세계시민상을, 2013년 드레스덴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2014년 다큐멘터리 영화 <세상을 구한 남자>를 통해 세계가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걸 의아해하면서 “그것은 나의 일이었고,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페트로프를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해 온 독일의 정치운동가 칼 슈마허는 지난 7일 페트로프한테 생일 축하 전화를 걸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했고, 외신들은 18일에서야 ‘세상을 구한 남자’의 죽음을 타전했다.
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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