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에 사는 러시아계 시민들이 중등학교에서 라트비아어로만 가르치게 한 교육개혁안에 반대해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 출처: ‘러시아 투데이’ 누리집 갈무리
라트비아가 중등학교에서 라트비아어로만 가르치겠다고 하자, 러시아가 경제 제재 카드로 압박하고 나섰다. 언뜻 불가해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유럽연합(EU)으로 편입된 라트비아와 옛 소비에트 연방 시절 영향력을 이어가려는 러시아의 물러설 수 없는 힘겨루기다.
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은 4일 국가두마(하원)가 ‘라트비아의 교육 개혁 법안’과 관련해 러시아 정부에 무역 중단과 불매운동 등 대라트비아 경제 재제를 촉구하는 성명을 채택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라이몬즈 베요니스 라트비아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을 보면, 2021년 9월부터 모든 중등학교에서 16~18살 학생들을 라트비아어로만 가르쳐야 한다. 라트비아에서는 2004년부터 라트비아어 사용을 확대하는 교육 개혁이 진행돼 왔는데,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계 등 소수민족의 권리를 침해하는 강제 동화 조처라며 반발해왔다.
유럽 북동부 발트해 연안 국가인 라트비아의 인구는 약 220만명으로, 유일한 공용어는 라트비아어다. 하지만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러시아계 가운데 30만명 정도는 라트비아어를 쓰지 않고 러시아어만 사용한다. 라트비아 시민권을 따려면 라트비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야 하는데, 이들은 시민권이 없어 ‘비시민권자’로 불리고 투표권도 없다. 2016년 라트비아 정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811개 국립 학교 가운데 94개교에서 러시아어로 혹은 라트비아어·러시아어 2개 언어로 가르치고 있다. 베요니스 대통령은 “언어 개혁은 사회를 더욱 응집력 있게 만들고 나라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라트비아는 유럽연합 내에서도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가장 많다. 대다수는 소련 시절에 대량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역사학자들은 러시아인 집단 이주가 라트비아의 문화와 언어를 희석시키고 결국엔 파괴하려는 스탈린의 정책이었다고 분석한다. 소련 시절 러시아계는 라트비아어를 배우지 않고서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으나 1991년 라트비아가 독립하면서 차별과 불이익이 시작됐다.
라트비아도 다른 발트해 국가인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처럼 소련 해체 과정에서 독립했다. 2004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그해 5월 유럽연합에 잇따라 가입하면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웠다. 특히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친러 분리주의자들의 대립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이라는 결과로 이어진 것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라트비아에서 러시아 정체성이 강한 이들은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고 라트비아 시민권 시험도 치르지 않는다. 라트비아에 살면서도 모스크바 미디어를 소비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크림반도 병합을 지지하기도 한다. 라트비아 시민권이 없으면 사업이나 가족 상봉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할 때 비자가 없어도 되는 이점도 있다. 물론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생각하는 러시아계는 라트비아어를 배우고 시민권을 취득해 유럽연합 국가를 자유롭게 오가며 일자리를 구하기도 한다.
전정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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