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다음달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북-미 정상회담이 취소됐다고 발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존의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고, 나중에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워싱턴/EPA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북미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하면서 벌어진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판은 트럼프 개인의 성향을 빼놓고는 성립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성향이 또 이 판을 뒤엎고 있기도 하다.
트럼프는 대선 운동 기간 중인 2016년 6월15일 애틀랜타 유세에서 햄버그를 먹으며 김정은과 직접 협상할 수 있다는 파격적 의지를 밝혔다. 트럼프는 “도대체 누가 그가 핵무기를 갖기를 원하겠는가? 그리고 (핵무기를 포기하게 할) 가능성은 있다. 나는 오직 우리를 위해 나은 협상을 할 거다”라며 “힐러리는 '그가 독재자와 대화를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만 좀 해라”고 항변하며 이같이 말했다. 트럼프는 “그가 (미국에) 오겠다면 만나겠다”며 “일찍이 본적이 없는 국빈만찬을 베풀겠다.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적들의 비난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협상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 100일인 2017년 4월30일 <시비에스>와의 회견에서 김정은이 젊은 나이에 “아주 거친 사람들에 대처하면서도” 권력을 맡았다며 “아주 똑똑한 녀석”(pretty smart cookie)이라고 말했다. 북한 지도자를 대화 상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특히, 트럼프는 북한과의 협상에 임하는 자신의 전략전술을 내비쳤다. 당시 북한이 미사일 실험 발사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트럼프는 북한의 미사일 실험이 “왜 계속 폭발하냐”는 질문을 받고는 “그걸 토론하지 않겠다”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조처들을 발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건 체스게임”이라며 “나는 내 생각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즉 협상에서 임하는 자신 특유의 예측불가성을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는 그 이후 북한 문제에서 그 예측불가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왔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자, 그는 ‘분노와 화염’이라는 표현을 쓰며 북한에 대한 핵공격을 시사했다. 이에 북한은 미군 기지가 있는 괌의 수역에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위협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이 있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기존의 미국 대통령과는 달리 트럼프가 북한 지도자의 이런 발언에 대꾸한 것은 그만큼 트럼프가 북한과의 수싸움을 염두에 둔 징후이다.
사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겨울올림픽 참가를 위한 남북접촉을 제안하면서 남북대화 재개를 밝혀, 북한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내비쳤다. 북한의 이런 태도 변화는 한달 전인 2017년 11월29일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하고는, ‘핵무력 완성’ 선언을 하면서 시작됐다. 북한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 해 12월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는 물밑 접촉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트럼프는 마지막 압박 전술의 강도를 높혔다. 그는 주한미군 가족들의 소개하는 계획을 짜서 자신에게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러한 조처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명령 초안이 작성되거 국가안보위 변호사들까지 그 검토를 마쳤다. 하지만,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과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은 그 계획이 시행되면 평창올림픽이 파탄나고 북한의 호전적 대응을 부를 것이라고 만류해, 내부 검토로 끝났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포함된 북한 대표단의 서울 방문으로 본격적인 대화 국면이 시작됐다. 김여정의 서울 방문을 통해 지난 3월5일 남쪽 특사단의 북한 파견과 김 위원장과의 면담도 성사됐다. 북한을 방문한 정의용 특사단을 곧바로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와 면담하면서 김 위원장의 북미정상회담 의향을 전달했고, 트럼프는 파격적으로 수용했다.
당시 트럼프는 자신의 결정을 행정부 관리들에게 발표하게 할 경우 왜곡될 우려가 있다며, 정 실장이 곧바로 직접 백악관에서 발표하도록 했다. 백악관 관계자들은 외국 인사가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발표한 전례가 없다며, 정 실장이 백악관 입구에서 발표하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이 해프닝은 북미정상회담이 트럼프 개인의 결단에 의해 당시 현장에서 전격 결정된 측면이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요청하고, 미국이 수락했다는 공식으로만은 설명이 안된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 때부터 밝혀온 북한과의 협상 용의가 북한을 추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취소의 한 이유가 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비난 담화에서 다른 주장을 한다. 그는 “저들이 먼저 대화를 청탁하고도 마치 우리가 마주앉자고 청한 듯이 여론을 오도하는 저의가 무엇인지”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3월11일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북미정상회담 제안 이전부터 유엔 루트 등을 통해 북쪽에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고 보도했다.
북한과 미국은 상대방이 더 아쉬워서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라고 내세웠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북미정상회담이 엎어진 첫 배경이기도 하다.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지난 4월29일 언론과 회견에서 북핵폐기 방식으로 리비아 모델을 언급하고, 이에 대해 북한이 반발하면서 북미정상회담은 암초에 부딪혔다. 펜스 부통령이 “북한이 합의하지 않으면 리비아 모델이 적용될 것”이라는 위협, 그리고 최선희 부상이 펜스를 ‘아둔한 얼뜨기’라고 비난하기까지 양쪽에서 나온 비방은 따지고 보면 본질적 문제를 둔 소음에 불과하다.
북미정상회담의 본질적 문제인 북한 비핵화와 북한 체제 보장을 놓고 양쪽이 상대방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소음이다. 트럼프는 이 소음마저도 자신 특유의 성향으로 대처했다. 볼턴의 발언에 대한 북한의 반발이 시작되면서부터 트럼프는 정상회담이 열릴지 “두고보자. 열리면 좋을 것이고, 안열려도 좋다”는 말로 주로 대응해왔다. 결국, 트럼프는 일단 판을 엎는 것으로 대응했다.
미국과 북한은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 보장이라는 도착지를 합의하고도, 어떤 길로 갈 것이냐를 놓고 싸우다 또 틀어졌다. 이는 본질적으로 북핵 문제가 불거진 지난 30년 동안 비핵화와 체제 보장 중 어떤 것이 먼저냐는 다툼의 연장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논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회담 판을 만든 트럼프의 개인기가 다시 이를 돌파할 수 있을지 ‘두고 봐야 한다.’ 정상회담 취소를 발표한지 몇시간 뒤에 트럼프는 “기존 정상회담이 열리거나, 정상회담이 나중에 열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도 초조해서는 안되며, 우리는 그것을 똑바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