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다낭/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방비 증액’을 놓고 유럽의 주요 동맹국에게 막말을 쏟아부은 뒤 16일 핀란드 헬싱키로 이동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연다. 이번 회담은 지난해 1월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향하게 될지를 가르는 ‘중대 고비’가 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영국 총리의 별장용 관저인 체커스에서 테리사 메이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과 논의할 의제’를 묻는 질문에 “우리는 푸틴 대통령에게 많은 것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시리아에 대해 논의할 것이고, 중동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다. 또 나는 핵 확산에 대해 말할 것”이라고 답했다. 즉, 이번 회담의 주요 의제를 △7년 째 장기화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과 그밖에 중동 문제 △러시아의 크림 반도 강제합병을 뜻하는 우크라이나 사태 △핵무기 감축 등으로 제시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다자 국제회의에서 푸틴 대통령과 두 차례 만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양자 정상회담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 회담에서 두 정상은 통역만을 대동하는 단독회담을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2014년 3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악화된 러시아와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는 한편, 푸틴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호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취임 이후 대선 승리 과정에서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이에 대한 특검 수사가 시작되며 정상회담 역시 지연돼 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4일 영국 스코틀랜드 턴베리에 있는 ‘트럼프 턴베리 럭셔리 컬렉션 리조트’에서 골프를 치며 채를 들어 보이고 있다. 지난 12일부터 나흘 일정으로 영국을 방문한 그는 16일 핀란드 헬싱키로 이동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한다. 턴버리/AFP 연합뉴스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관에 대해 러시아를 전통적인 ‘가상의 적’으로 보는 워싱턴의 외교·안보 주류들은 미국과 유럽 사이의 ‘대서양 동맹’을 와해시키고 미국의 안보와 패권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라고 반발해 왔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11~12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에 “국방비를 더 부담하라”고 요구하며,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는 독일에 “러시아의 포로”라는 막말까지 퍼부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안보에 직결되는 주요 현안에 대해 푸틴 대통령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나토는 큰 충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푸틴 정상회담을 앞둔 13일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스캔들을 수사 중인 로버트 뮬러 특검이 러시아군 정보요원 12명을 무더기로 기소한 것도 트럼프의 러시아 접근에 대한 견제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시엔엔>(CNN) 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유럽에서 진행되는 나토 군사훈련의 중단을 언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그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아마도 우리가 그것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5일자 영국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대통령)은 무자비한 독재자 중 하나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가 그렇다고 추측할 수 있으나 (중략) 우리가 러시아와 사이좋게 지낸다면 좋은 일이다”고 응답했다.
러시아도 이번 회담에 큰 기대감을 내비쳤다. 푸틴 대통령의 보좌관인 유리 유사코프는 “(현재) 양국 관계는 아주 나쁘다”며 “우리는 이를 올바르게 정립하기를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적 입지 강화를 위해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이번 회담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때처럼 미-러 관계를 전복하는 시작이 된다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흔들려 온 미국의 기존 외교관행과 대외정책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미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