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6일 핀란드 헬싱키 대통령궁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공식 정상회담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날 밤 막을 내린 러시아 월드컵의 공인구를 선물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26년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와 공동 유치한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했다. 헬싱키/AP 연합뉴스
‘적의 위협에 대처하는 동맹을 유지하는 부담을 지기보다는 그 적과의 타협과 화해로 위협을 제거하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점점 가시화되는 그의 세계관이자 대외정책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기존 세계관과 대외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도전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 도전이 분수령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16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러시아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다짐했다. 이같은 입장은 취임 이후 그에게 쏟아진 국내외의 비판과 우려를 최고조로 비등시키고 있다. 공화당 내의 친트럼프 의원들까지 격렬한 비난에 가세해, 상황이 그의 정치적 운명을 가를 변곡점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 정상회담은 취임 이후 그가 펼쳐온 정상 외교 등 일련의 외교 행보의 일단락이다. 이 회담을 전후해 트럼프 대통령은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세계관과 대외 정책이 기초를 두는 적과 동맹에 대한 기존 인식의 전복을 명확히 했다.
그는 정상회담에 앞서 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와 영국 방문에서 미국 패권을 유지하는 주춧돌인 대서양 양안 동맹 중 유럽 쪽 파트너인 유럽연합(EU)에 대한 회의를 표출하면서, 나아가 유럽의 분열과 약화를 사실상 부추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연합의 중심국인 독일을 국방비 지출이 적다거나 러시아에서 에너지를 수입한다는 이유로 공격했다. 게다가 유럽연합 탈퇴를 협상중인 영국에게 완전한 유럽연합과의 단절을 요구했다. 그는 유럽연합과의 기존 관계를 유지하려는 테리사 메이 총리의 ‘소트프 브렉시트’ 계획은 영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무산시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또 메이 총리에게 유럽연합을 제소하라고 권고하고, 자신에게는 “유럽연합이 적”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대서양 동맹이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러시아에 대해서는 ‘적이 아니라 경쟁자’라며 “러시아와 사이 좋게 지낸다면 좋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나는 그(푸틴)를 경쟁자로 불렀다. 그는 좋은 경쟁자다. 경쟁자라는 말은 칭찬이라고 생각한다”며 러시아와의 대화와 협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나는 오직 저항과 반대만 하는 당파적인 비판자나 언론, 민주당원들을 달래려는 헛된 노력으로는 외교 정책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없다”며 “미국과 러시아의 건설적 대화는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향한 새로운 길을 열 기회를 만든다. 나는 정치를 좇으면서 평화를 위기에 빠뜨리기보다는 평화를 추구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평소 미국 사회 안에 뿌리를 박고 나라를 좌우하는 기득권층 집단인 ‘디프 스테이트’(Deep State)가 있다는 음모론적 주장을 해왔다. 이날 발언은 자신에 대한 비난은 그런 세력의 방해 공작일 뿐이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라시아대륙에서 압도적 패권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것을 최대 과제로 설정했다. 러시아나 중국은 유라시아대륙 패권국 후보로서 가상 주적으로 설정됐고, 미국은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이들의 부상을 봉쇄하기 위한 강력한 동맹 세력으로 구축해왔다. 동맹국들을 위한 군사비 지원이나 무역적자 감수는 미국의 패권 유지로 얻는 더 큰 이익을 위해 필요한 비용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나토 등 동맹들에 대한 군사비 지출과 무역적자는 미국이 아니라 동맹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보수적인 백인 중·하류층 중심의 지지층도 미국의 기존 대외 정책은 기득권층 등 상류층 이익에만 봉사한다는 인식에 따라 그를 지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등 동맹국들에게는 방위비를 더 부담시키고, 대미 무역적자를 축소하고, 러시아와는 협력해서 중동 등지의 분쟁 등 국제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과는 지정학적 대결보다는 무역 등 경제 문제 해결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이런 그의 철학은 취임 이후 유럽 등 동맹들에 대해 군사비 증액을 압박하면서 무역 전쟁을 격화시키고, 중국에 대해서도 무역 등 경제 문제에 집중해 압력과 무역 전쟁을 전개한 데서 잘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 정책이라고 명명하나, 워싱턴 주류들은 ‘아메리카 얼론’(미국 홀로주의)이라고 비난한다.
기존 동맹에 대한 회의는 적으로 설정하는 러시아 및 북한 등과의 협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김정일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 및 북한과의 관계 회복 시도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이번 미-러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전통적인 주적이자 미국 대선 개입 의혹까지 사는 러시아에 대해 기존 동맹 관계를 균열내면서 접근을 시작했다.
기존 동맹에 대한 회의 및 적과의 타협이라는 기조를 선명히 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 정책은 세계에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조성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개입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고, 러시아와의 타협이 진전될 경우 중동 분쟁 등에서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미국 공화당 내에서 정통 보수로 인정 받는 존 케이시크 오하이오 주지사는 <피비에스>(PBS)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는 “철거 기중기 외교”라며 전후 70년 동안 미국이 지켜온 동맹 관계를 파탄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는 “우리가 러시아가 상징하는 많은 것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군비를 제한할 추가적인 군축 회담과 협정의 필요가 있고, 그것이 없다면 세계에 위험을 조성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의 즉자적인 국익만을 챙기는 무역 전쟁과 기후변화협정 탈퇴 등 위기도 발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의 보수 수니파 왕정 국가들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이란 핵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모순된 정책을 취하기도 한다. 강경한 이민 및 인종, 종교 정책 등으로 국제사회에 퇴행적인 사조를 조장하고 있기도 하다.
동맹의 유지와 강화보다는 적과의 타협에 더 방점을 찍겠다는 그의 세계관은 이날 그가 밝힌 러시아의 대선 개입에 대한 입장과 맞물려, 워싱턴 주류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하는 변곡점으로 몰고 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일관되게 지지해온 극우 성향인 <폭스뉴스>의 진행자조차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잘못된 것”이라며 “미국 대통령이 우리의 가장 큰 적, 상대국, 경쟁자에게 최소한의 가벼운 비판조차 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미국의 저명한 현실주의 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최근 <피비에스>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방위비 문제를 이용해 유럽 국가들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고 있는데, 그의 궁극적 목표는 더 크다”며 “그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이 만든 나토와 세계무역기구(WTO) 등 모든 국제 제도와 기구를 포함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반대하는 후보로 출마했다”고 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트럼프는 확실히 러시아를 큰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며, 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동맹 구도에 입각한 미국의 대외 정책은 분명 잠식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존 미국의 세계관과 대외 정책을 확실히 전복할 수 있을까?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할 수 있느냐가 첫 시금석이다. 공화당이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느냐 못 하느냐는 결국 그에 대한 심판 여부로 연결된다. 공화당이 승리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인도하는 전혀 가보지 않은 길로의 행보가 계속될 것이다. 패배한다면 그의 도전은 일회성 해프닝으로 종식될 것이다. ‘평화를 추구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감수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현란한 수사이기는 하지만, 그가 처한 정치적 운명과 상황에 의해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