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6일 핀란드 헬싱키 대통령궁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첫 공식 정상회담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날 밤 막을 내린 러시아 월드컵의 공인구를 선물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26년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와 공동 유치한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했다. 헬싱키/AP 연합뉴스
‘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맹을 유지하는 부담을 지기보다 적과의 타협과 화해로 위협을 제거하자.’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2017년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 정책이 집권 1년 반을 지나며 더 명료한 형태로 드러났다. 미국이 유지해온 세계관과 대외 정책을 뒤집는 ‘전복적’ 세계관이 현실 외교 무대에서 명확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은 11~12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서 시작해 1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으로 끝난 이번 유럽 순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러 관계는 사상 최악의 상태였지만, (정상회담이 시작된) 4시간 전에 바뀌었다. 나는 오직 저항과 반대만 하는 당파적 비판자나 언론, 민주당원들을 달래려는 헛된 노력으로 외교 정책을 결정하지 않겠다. 미-러의 건설적 대화는 세계 평화와 안정을 향한 새 길을 열 기회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정치를 쫓으며 평화를 위기에 빠뜨리기보다는 평화를 추구하며 정치적 위기를 감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인식은 2차대전 이후 70년 넘게 이어진 미국 대외 정책의 뼈대를 근본부터 흔드는 것이다. 그는 15일 방영된 <시비에스>(CBS) 방송 인터뷰에선 “유럽연합(EU)이 무역에서 우리에게 하는 것을 볼 때 (미국의) 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디. 미국의 오랜 동맹인 유럽을 러시아나 중국보다 먼저 ‘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2차대전 승리 이후 미국은 패권 유지를 위해, 유라시아대륙에서 압도적 패권국의 등장을 저지하는 것을 최대 외교 과제로 설정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가상 ‘주적’으로 설정됐고, 유럽의 나토와 동아시아의 일본·한국은 이들의 부상을 봉쇄하는 동맹이 됐다. 미국은 동맹 강화를 위해 지불하는 군사비와 무역적자를 패권 유지로 얻는 더 큰 이익을 위한 당연한 비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나토 등을 위한 군사비 지출과 막대한 무역적자에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같은 인식에 보수적인 백인 중·하류층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기존 대외 정책은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할 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등 동맹에 대해 회의를 드러내며 국방비 증가와 대미 무역적자 축소를 요구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지정학적 대결 대신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러시아와는 협력을 통한 중동 등의 국제 분쟁 해결을 다짐했다. 자신의 정책을 ‘미국 제일주의’(아메리카 퍼스트)라 부르지만, 워싱턴 주류들은 ‘아메리카 얼론’(미국 ‘홀로주의’)라고 비난한다.
동맹에 대한 회의는 적과의 타협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트럼프 대통령의 철학은 세계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최대 외교 과제인 한국에 뜻밖의 전략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좋은 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대 미국 정부였다면 하지 않았을 북-미 정상회담에 응했고,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신뢰 조성이 필요하다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즉자적 이익만 고려하는 미국 제일주의는 자유무역 질서를 흔드는 무역 전쟁, 파리 기후변화협정 탈퇴, 이란 핵협정 탈퇴 등 위험한 결론으로 흐르는 경우도 많다. 또 무관용적 이민, 종교 정책으로 국제사회의 퇴행적 흐름을 조장하고 있다.
이같은 세계관은 워싱턴 주류들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을 부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일관되게 지지해온 극우 <폭스뉴스>의 진행자조차 미-러 정상회담 뒤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잘못된 것”이라며 “미국 대통령이 우리의 가장 큰 적, 상대국, 경쟁자에게 최소한의 가벼운 비판조차 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미국의 현실주의 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공영방송 <피비에스>(PBS)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국방비 문제로 유럽 국가들의 머리를 망치로 때리는데, 그의 궁극적 목표는 그보다 더 크다”며 “그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이 만든 나토와 세계무역기구(WTO) 등 모든 국제 제도와 기구를 포함하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반대하는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복적 외교 정책은 미국의 전통적 세계관과 대외 정책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까. 11월 중간선거가 첫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공화당이 승리하면, 미국은 그가 인도하는 ‘가보지 않은 길’로 더 깊숙이 빠져들 것이다. 패배한다면 ‘해프닝’으로 종식될 수도 있다. ‘평화를 추구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감수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현란한 수사이긴 하지만, 그가 놓여 있는 정치적 상황을 생각할 때 정확한 현실 묘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