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 1차대전 미군 전사자들이 묻힌 파리 외곽의 쉬렌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파리/AP 연합뉴스
배타적 민족주의가 낳은 참화인 제1차 세계대전을 반성하는 종전 100돌 기념식은 60개국이 넘는 국가의 정상들이 참석해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세계에 던졌다. 그러나 초강대국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나 홀로’ 행보로 민족주의의 재부상을 상징하는 기회도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정상들은 국제사회의 분열과 다시 부상하는 민족주의를 경고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기념식의 의전들을 무시한 행보를 이어갔다.
정상들은 이날 종전 100돌 기념식에 이어 ‘파리 평화포럼’에 참석해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을 겨냥한듯 우려와 경고를 쏟아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기조연설을 통해 두 차례 세계대전의 무의미한 유혈 사태를 이끈 “민족적 자만심과 군사적 오만”을 비난하며 국제적 협력을 촉구했다. 그는 “고립주의는 100년 전에 역할을 못 했는데, 어떻게 현재의 상호 연계된 세계에서 역할을 할 수 있겠냐”며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했다. 또 “소통의 부족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치명적 결과들을 낳는다고 역설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1차대전 전 평화의 실패를 이끈 몇몇 요인들을 현재 세계가 안고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뒤에 진행된 유럽연합(EU)의 통합은 실패하면 안 되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며, 유럽연합 내의 신뢰의 위기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세계의 안정이 민족주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극단주의뿐 아니라 경제, 환경, 이주 문제 등으로 위협받는다고 경고했다.
민족주의 부상과 분열의 중심인물로 거론되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 포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파리 서쪽 미군 묘지를 참배했다. 전날 파리 동쪽 미군 묘지를 참배할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나쁘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가 이날 참배로 대신한 것이다. 그는 참배 뒤 곧바로 귀국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전 종전 100돌 기념식에서도 ‘나홀로 행보’를 이어갔다. 엘리제궁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해 샹젤리제 거리에서 추모 행진을 한 다른 나라 정상들과는 달리 조금 늦게 전용차 ‘비스트’를 타고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념식장으로 가는 그의 차량 행렬에 상의를 벗은 여성이 뛰어들어 “가짜 평화 일꾼”이라고 소리치는 소동도 있었다.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 파기 여부를 놓고 씨름하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기념식장에 따로 도착했다. 양대 강국 정상이 대참화를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의 정상들의 행진에 동참하지 않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문 일정 중 많은 시간을 숙소인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저에서 보냈다. <에이피>(AP) 통신은 파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 제일주의’는 ‘미국 홀로주의’를 의미했다고 평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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