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정적으로 불리는 러시아 야권인사 알렉세이 나발니. AP 연합뉴스
독일 의료진이 독극물 중독 증세로 의식을 잃은 러시아 야권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44)에 대해 ‘독성 물질이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반면, 나발니를 응급조치한 러시아 쪽은 독극물 중독 징후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푸틴 정적’으로 불리는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 의혹 사건을 둘러싼 국제 사회의 공방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 집권 이후 러시아에서는 체제 비판자 등 여럿이 나발니와 비슷한 독살 사건으로 죽거나 다쳤고, 독살 증거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러시아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비시>(BBC) 방송 등은 나발니의 치료를 맡은 독일 샤리테 병원이 24일(현지시각) 성명을 내어 “임상증거는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에 속하는 물질에 의한 중독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나발니가 독성 물질에 의해 피해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는 신경전달 물질인 아세틸콜린의 가수분해 효소를 억제하는 물질로,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 치료에 사용하고 농약에 쓰이기도 한다. 이 억제제가 신경작용제로 사용될 경우 신경계에서 아세틸콜린 농도를 높여 호흡, 근육의 마비를 유발하고 심장박동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샤리테 병원은 “아직 정확한 물질은 파악되지 않았다”며 “광범위한 분석을 하고 있고, 독립 실험실에서 독성 물질의 효과가 여러 차례 입증됐다”고 말했다.
나발니는 여전히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병원은 나발니가 아직 위독한 상태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밝혔다.
나발니는 지난 20일 러시아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던 비행기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나발니 쪽은 그가 공항에서 차를 마신 게 유일했다며, 차에 독성 물질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옴스크 병원에서 치료받던 나발니는 22일 독일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샤리테 병원. 베를린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AP 연합뉴스
병원 발표에 앞서 독일 총리실 대변인인 슈테펜 자이베르트는 이날 나발니에 대해 “독극물에 중독됐을 가능성이 큰 환자를 다루고 있다. 공교롭게도 최근 러시아에서 (독극물 공격) 의심 사례가 있었다”며 러시아 당국에 투명한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 가능성을 부인했다. 지난 21~22일 나발니가 입원했던 러시아 옴스크 구급병원의 독극물과장 알렉산드르 사바예프는 이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발니는 마약, 환각제,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 등의 약물에 대한 다양한 검사를 받았으나 결과는 음성이었다”며 “콜린에스테라아제 억제제 그룹에 속하는 물질 중독에 특징적인 임상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나발니를 함께 진료한 모스크바 피로고프 센터의 마취통증의학과장 보리스 티플리흐도 “(러시아 병원에서도) 나발니의 중독설을 검토했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며 샤리테 병원 의료진은 임상징후에 관해 얘기할 뿐 이런 증상을 초래한 물질 자체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아니며 그런 물질은 아직 누구에 의해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푸틴 대통령을 비판해 온 나발니가 고의로 공격받은 정황이 짙어지면서, 의심의 눈초리는 푸틴 대통령 쪽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나발니를 중독시킨 물질이 발견되더라도, 누가 이 물질을 사용해 그를 공격했는지 확인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사건 정황이 드러나더라도 러시아가 이를 인정할지 역시 미지수다. 2006년 11월 전 러시아 정보요원으로 푸틴을 비판하다 영국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한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사건과 관련해, 영국 당국은 2016년 러시아 연방보안국 요원들이 그를 독살했고, 푸틴 대통령이 관여됐을 수 있다고 결론냈지만, 러시아 당국은 끝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2018년 3월 초에도 러시아 출신 이중간첩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독극물 테러로 쓰러졌고, 미국은 그해 8월 러시아가 신경작용제 ‘노비촉’을 사용해 스크리팔을 독살하려 한 것으로 결론 냈지만 러시아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