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 자회사인 영국 반도체 개발 기업 에이아르엠(ARM·암홀딩스)을 총 400억달러(약 47조3560억원)에 인수한다. 반도체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에이아르엠을 품은 지 4년 만에 손을 떼게 됐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영국 <로이터> 통신 등 보도를 보면, 엔비디아와 소프트뱅크는 13일(현지시각) 공동 성명을 내어 “엔비디아는 소프트뱅크와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에이아르엠을 400억달러에 인수한다는 최종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소프트뱅크는 에이아르엠 지분 100%를 엔비디아에 넘기고, 엔비디아는 소프트뱅크에 현금 120억달러와 엔비디아 주식 215억달러어치를 지급한다. 또 에이아르엠 직원들에게 엔비디아 주식 15억달러어치를 주고, 에이아르엠이 실적 목표를 달성하면 추가로 소프트뱅크에 50억달러를 현금 혹은 주식으로 지급한다.
엔비디아는 세계 최대 그래픽 칩셋(GPU·그래픽 처리장치) 회사로, 자율주행 등의 영상·그래픽 처리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다. 올해 인텔을 제치고 미국 반도체 회사 중 시가총액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에이아르엠은 반도체 설계도를 만들어 삼성전자나 애플, 퀄컴 등에 로열티(사용료)를 받고 파는 회사다. 저전력 설계 기술로 모바일용 반도체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이번 인수합병으로 반도체 업계 지형이 바뀔 수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세계 최대 그래픽 칩셋(GPU) 회사인 엔비디아가 반도체 기본 설계도를 만드는 에이아르엠을 인수해 중앙처리장치(CPU) 기술까지 갖추게 되면, 향후 반도체 시장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칩과 중앙처리장치는 인공지능, 자율주행, 가상현실(AR) 등 4차 산업혁명 주요 분야들의 핵심 요소다.
장밋빛 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이아르엠은 반도체 설계 회사로 별다른 경쟁 상대가 없었지만, 엔비디아와 합치면 문제가 달라진다. 장기적으로 엔비디아와 경쟁 관계에 있는 삼성전자와 퀄컴, 애플 등이 에이아르엠의 주요 고객이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 입장에서는 엔비디아 품으로 들어간 에이아르엠의 설계를 계속 쓰기가 껄끄러울 수 있다. 엔비디아는 이를 의식해 이날 “에이아르엠의 성공 기초가 된 오픈 라이선스 모델을 계속 운영할 것이다. 회사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회사가 보유한 영국 회사를 미국 회사가 인수하는 것인 만큼 각국 규제 당국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블룸버그>는 영국과 유럽연합(EU), 미국, 중국 등 규제 당국의 승인을 모두 받으려면 1년 6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다. 실패 사례도 있다. 미국 반도체 회사 퀄컴은 네덜란드 회사 엔엑스피(NXP)를 440억달러(약 50조원)에 인수하려다 2018년 중국 규제 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인수 4년 만에 에이아르엠을 매각하게 됐다. 손 회장은 2016년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흥분된다”며 234억파운드(당시 약 35조원)에 에이아르엠을 인수했다. 소프트뱅크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영난으로 올 3월부터 최대 4조5천억엔(약 50조원) 상당의 보유 자산을 현금화한다는 방침에 따라, 에이아르엠과 미국 이동통신업체 티(T)모바일 등의 매각을 추진해 왔다.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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