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오후 오하이오주로 출발하기 전 백악관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8일 세상을 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자 임명 절차를 대선(11월3일) 전에 마치기로 하고 속도를 내고 있다. 민주당은 새 대법관 후보를 오는 대선에서 승리하는 이가 지명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는 대선 전에 임명 절차를 마쳐서 압도적 보수 우위 구도로 연방 대법원 대법관 구성에 쐐기를 박아두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21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긴즈버그의 후임자를 오는 25일이나 26일에 지명하겠다고 말했다. 오는 24일 끝나는 긴즈버그의 장례식 직후에 후임자 인선 절차를 공식화겠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후임자에 대한 상원에서의 인준 표결 시점에 대해 “대선 전에 표결을 하는 게 좋겠다. 왜냐면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며 “내가 만약 26일에 (후임자) 발표를 한다고 쳐도 대선 전에 시간이 엄청 많다”고 말했다.
공화당의 미치 매코넬 상원 원내대표도 이날 의회에서 “상원은 지명 절차에 충분한 시간 이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전례를 볼 때 대법관 후보자 지명부터 상원 청문회와 표결, 공식 임명까지 통상 71일이 걸렸다. 하지만 매코넬은 이 과정에 19일 걸렸던 존 폴 스티븐스 전 대법관, 33일이 걸린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대법관의 사례를 들었다. 숨진 긴즈버그는 이 과정에 42일 걸렸다. 이날 기준으로 미 대선까지는 43일 남았다.
미국에서 진보의 아이콘으로 꼽혀온 긴즈버그가 숨지기 전까지 미 대법원은 보수 5, 진보 4의 구도였으며, 이 가운데 보수 성향인 존 로버츠 대법관이 최근 성소수자 관련 판결에서 진보 쪽 입장에 서면서 균형을 맞춰왔다. 트럼프가 긴즈버그 후임으로 보수 인사를 임명하면 대법원은 보수 6, 진보 3으로 재편돼, 로버츠 대법관의 ‘캐스팅 보트’ 역할도 의미를 잃게된다.
공화당 전략가들 사이에는 새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상원 인준 표결을 대선 전에 할지, 후에 할지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 후보자만 지명해놓고 표결은 대선 뒤로 미루는 게 대통령과 상원의원의 3분의 1, 하원의원 전체를 동시에 선출하는 11월3일 선거에서 공화당 지지층의 투표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반대로, 만약 11월3일 트럼프가 패배하고 상원도 공화당이 져서 다수당 지위를 잃게 되면 “바이든에게 새 대법관 결정을 넘기라”는 압박이 더 거세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는 이날 ‘대선 전 임명 완료’로 방향을 제시한 셈이다.
이번 대선의 승자가 11월3일 선거 직후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트럼프의 속도전 욕구를 부추겼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올해 대선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우편투표가 대폭 확대되면서, 투표용지 회수와 개표에 시간이 지연되고 지역에 따라 오류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그동안 “우편투표는 사기로 연결될 수 있다”고 공격해온 트럼프가 대선 결과를 부정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 경우 2000년 대선 때 플로리다주 재검토 사태처럼 이번 대선의 승자를 대법원이 결정해야 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로서는 대법원 구도를 ‘보수 5명, 진보 3명’보다는 ‘보수 6명, 진보 3명’으로 대선 전에 바꿔놓는 게 더 유리하다고 봤을 수 있다.
트럼프는 긴즈버그 후임으로 “5명의 여성”을 검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일부와는 대화를 나눴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미 언론은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법 판사, 바버라 라고아 제11연방고법 판사, 앨리슨 존스 러싱 제4연방고법 판사 등을 유력한 후보로 거명하고 있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전날 유세에서 트럼프가 후임 대법관 후보를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대선에서 내가 승리하면 트럼프의 대법관 후보 지명은 철회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관 후보자가 상원 인준을 통과하려면 절반인 50표 이상을 얻어야 한다. 현재 상원 의석은 공화당 53석, 민주당과 무소속 47석으로 공화당이 다수다. 공화당 안에서 4명의 이탈표가 나오면 트럼프와 당 지도부의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공화당 내에서 ‘대선 전 새 대법관 임명 반대’ 뜻을 밝힌 상원의원은 리사 머코스키와 수전 콜린스 2명이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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