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수도 리마에서 15일(현지시각) 오토바이를 탄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리마/AP 연합뉴스
페루 의회의 대통령 탄핵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 시위가 거세지면서, 임시 대통령이 취임 5일 만에 사임했다.
15일(현지시각) 마누엘 메리노 페루 임시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본인의 사임을 발표했다. 지난 10일 부통령에서 임시 대통령이 된 지 닷새 만이다. 그는 자신은 임시 대통령직을 “치욕과 영광”으로 알고, 책임을 다하려 했다며 “스스로 원하지도 않은 직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층이 주류인 시위대를 향해 “너무 혼란과 폭력에 치우쳐 있다”며 “제발 모든 페루 국민을 위해 평화와 단결을 요청한다. 페루는 앞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나라다”라고 말했다.
페루에서는 지난 9일 마르틴 비스카라 전 대통령이 뇌물의혹으로 의회에 의해 탄핵당한 뒤, 청년층을 중심으로 의회와 임시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외신과 인권단체들 보고를 보면, 12일에는 페루 전역에서 20년 만에 최대 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14일 시위에서는 112명이 다치고 4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메리노 임시대통령이 사임까지 이른 것은 지난 14일 시민 2명이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국 발표를 보면, 사망한 시위대 잭 핀타도(22)는 머리를 비롯해 11군데 총상을 입었고 호르단 소텔로(24)는 심장 부근에 4차례 총을 맞았다.
20대 청년 2명이 경찰에 의해 사망한 사실이 알려진 뒤 임시대통령에 대한 사임 요구가 커졌고, 새로 꾸린 내각의 장관들도 절반 이상 사임했다. 메리노 임시대통령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본인 트위터에 “두 젊은이가 경찰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불법적으로 희생됐다”며 “모든 페루인이 반대하는 이런 억압은 멈춰져야 한다”고 썼다.
페루의 정치적 혼란은 지난 9일 불이 붙었다. 이날 페루 의회는 비스카라 당시 대통령에게 도덕적 문제가 있다며 탄핵을 결정했다. 비스카라 전 대통령이 주지사 시절이던 2011∼2014년 인프라 공사 계약을 대가로 기업들로부터 230만솔(약 7억2천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비스카라 전 대통령이 의혹을 부인했고, 검찰 수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지만 의회는 탄핵을 강행했다. 전체 의원 130명 중 105명이 탄핵에 찬성했다. 앞서 의회는 지난 9월에도 또 다른 부패 의혹을 제기하며 대통령 탄핵을 시도했으나 찬성 32명에 그쳐 부결됐다.
페루 시민들은 이번 탄핵을 의회의 ‘부당한 쿠데타’로 보고 있다. 강도 높은 반부패 개혁을 추진하는 비스카라 전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해 부패한 의회가 벌인 불법 행동이라는 것이다. 실제 페루 의원 130명 중 절반이 넘는 68명이 부패 혐의로 당국의 수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대가 비스카라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시위에 참가한 세자르 안칸테 리마대 졸업생은 “이번 시위는 비스카라의 복귀를 위한 것이 아니고, 명확히 메리노를 반대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의 부패에 넌덜머리가 난다”고 말했다.
2018년 파블로 쿠친스키 전 대통령 낙마 이후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중도 성향의 비스카라 전 대통령은 강도 높은 반부패 개혁을 추진하며 여론의 지지를 받아왔다. 여론조사를 보면, 페루 국민 5명 중 4명은 비스가르 전 대통령의 축출에 반대하고, 비슷한 규모로 내년 7월 그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검찰이 그를 수사하는 방안을 지지하고 있다.
메리노 임시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하자 리마의 시민들은 “우리가 이겼다”며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의회는 이날 오후 늦게 다시 비상회의를 소집해 새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했다.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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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메리노 페루 임시대통령이 15일(현지시각) 리마에서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 리마/EPA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