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8월15일(현지시각)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는 20일(현지시각) 4년 만에 백악관을 떠났지만, 퇴임 뒤에도 미국과 세계에 오래 남을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는 ‘미국의 귀환’을 내건 조 바이든 신임 대통령이 풀어야할 숙제이기도 하다.
‘법원 보수화’ 대못 박고, 백인우월주의로 분열 극대화, 코로나19 대처 실패
트럼프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미 사법부의 보수화다. 그는 4년 동안 연방 대법관을 닐 고서치, 브랫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등 세 명이나 임명해 대법원 이념지형을 보수 6, 진보 3의 보수 절대우위 구도로 대못 박았다. 대법원 바로 아래급인 13개 연방 항소법원 판사 또한 54명이나 임명했다. 전임 대통령들이 8년 동안 임명한 항소법원 판사 수 50~60명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경제 분야에서 트럼프는 법인세를 35%에서 21%로 낮추고, 80여건의 환경·보건 규제를 완화했다. 친기업적 정책 등에 힘입어 탄탄해 보이던 미국 경제는 지난해 봄 코로나19가 덮치면서 악화했다. 트럼프는 코로나19 초기부터 “독감 같은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마스크 착용도 거부해 사태를 키웠다. 지난해 10월에는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본인이 코로나19에 감염됐다. 코로나19 대처 실패는 그의 재선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미국의 코로나19 누적 사망자는 40만명이 넘는다. 코로나19로 인해 미국 실업률과 재정적자가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트럼프는 백인우월주의적 태도로 미국 사회의 분열을 극대화했다. 그는 2017년 8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벌어진 유혈사태 때 백인우월주의자들을 비난하지 않았고, 지난해 5월 경찰 폭력에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태에 항의하는 미 전역에 걸친 시위 때 ‘법과 질서’를 앞세운 강경대응 기조를 고수했다. 이같은 태도는 일부 무슬림 국가의 미국 입국 제한 조처 등 강력한 반이민 정책과도 연결된다. 그는 멕시코 국경 지대에서 불법 이민자들의 부모와 자녀를 분리하는 무관용 정책을 폈다.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은 그의 대선 주요 공약이었다. 그는 국경장벽 건설비용을 멕시코가 부담할 것이라고 했으나, 미 국방부 예산을 끌어다 써야했다.
‘미국 우선주의’ 내걸고 동맹 경시하고 다자주의 걷어차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 깃발을 앞세워 동맹 관계를 악화시키고 다자주의를 걷어찼다. 그는 한국·일본과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들에 미군 철수를 협박하면서 방위비분담금 대폭 인상을 요구했다. 트럼프는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이란핵합의에서 일방 탈퇴하며 리더 국가이기를 포기했고, 국제보건기구(WHO)와 유엔인권이사회(UNHRC)도 탈퇴했다.
미-중 관계는 사상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가 중국과 벌인 무역전쟁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3700억달러의 관세를 부담하게 됐다. 무역전쟁은 지난해 1월 1단계 합의로 휴전에 들어갔으나, 미국은 홍콩·대만·남중국해 문제나 화웨이 등 기술 분야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첨예하게 각을 세웠다. 트럼프는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끝까지 자극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김정은 국무위원장)를 세 차례나 만나고 북한 땅(판문점 북쪽 지역)을 밟는 이정표를 세웠으나, 실질적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진전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트럼프는 대외정책 주요 성과로 이슬람 주요 지도자 제거를 꼽는다. 미국은 2020년 1월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쿠드스군 사령관을 무인기로 공습 살해했다. 앞서 2019년 10월에는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수괴인 아부 알바드다디를 제거했다. 그는 중동에서 줄곧 친이스라엘 반이란 정책을 밀어부쳤다. 그는 2018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팔레스타인 등 아랍권의 반발을 샀다. 트럼프는 임기 말인 지난해에는 이스라엘과 친미 아랍국인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수단의 관계 정상화 협정을 중재했다.
대선 불복과 지지자들 의사당 난입으로 민주주의 파괴
트럼프는 분열과 혐오의 통치를 하면서도 지난해 11월3일 대선에서 무려 7422만여표(조 바이든 8128만여표)를 얻어 미 사상 두번째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이처럼 트럼피즘의 위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보인 것 또한 그가 미 역사에 남긴 일이다. 동시에 그는 미 역사상 11번째, 1992년 조지 H. W. 부시 이후 28년 만에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그는 대선 전부터 암시한대로 근거도 없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결과 뒤집기를 시도하며 미국 민주주의를 전세계의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애틀랜틱카운슬의 엠마 애시포드 선임연구원은 이달 초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자국 안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미국이 어떻게 다른 국가들에 민주주의를 전파하거나 모범국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라고 지적했다.
7400만 지지자와 트럼피즘은 바이든·공화당·미국의 숙제
트럼프가 어떤 정책 성과를 주장하더라도 그의 마지막 모습은 대선 불복과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 사태, 그리고 미 사상 처음으로 하원에서 두번 탄핵소추당한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그는 남북전쟁 이후 최악으로 분열된 미국을 남겨놓고 퇴장했다.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손 들어준 트럼피즘은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 전체의 과제다. 공화당도 트럼피즘에서 벗어나면서도 트럼프 지지층을 끌어안아야 하는 난제를 안았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jay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