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칠레는 지난해 대규모 국민시위와 코로나19 사태라는 이중고를 겪었다. 국제 문제인 코로나 사태는 아직 진행형이지만, 지하철 요금 30페소(50원) 인상으로 촉발된 국민시위는 지난해 10월 ‘헌법 새로쓰기’라는 역사적 결과물을 낳고 해산했다. 국가의 틀을 다시 짜는 작업에 한껏 들떠 있는 칠레에선 155명을 뽑는 4월 제헌의원 선거에 모두 3300여명이 후보로 나섰다.
<한겨레>는 지난해 10월 주한 칠레대사로 부임한 글로리아 시드 대사를 지난달 말 직접 만나고, 전자우편으로 추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칠레 사회가 누적된 부작용을 교정하는 중이라며, 기존 세력뿐만 아니라 여성과 원주민이 주체가 돼 새 헌법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의원 남녀비율 ‘5대 5’…“여성 출마자 적으면 여성에 이점 줘”
칠레는 155명의 제헌의원 중 남녀 비율을 ‘5 대 5’로 하기로 했다. 시드 대사는 사전 질문지에 “세계 최초의 성비균형 헌법이 될 것이다. 세계가 이를 주목하고 있다”고 답변한 뒤 밑줄을 그어 보내왔다. “기계적으로 5 대 5로 딱 맞추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균형을 맞추게 될 것이다. 예컨대 여성 의원 출마가 적을 수 있다. 이 경우 다른 점을 고려해, 여성 출마자에게 이점을 줄 것이다. 이는 헌법을 만드는 데 있어 여성의 목소리를 더 잘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칠레 국회의 여성 의원 비율은 4명 중 1명꼴인 23%인데, 두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위에서도 여성의 역할은 주도적이어서, 지난해 3월 세계 여성의 날, 100만명 이상의 칠레 여성이 모여 행진을 했다. 지난해 9월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칠레의 여성단체 라떼시스가 뽑히기도 했다. 한국에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봉준호 감독이 뽑힌 조사였다.
지난달 중순에는 제헌의회에 원주민 의원을 17명 포함하기로 했다. 전체 의원의 10.9%로, 칠레 사회의 원주민 비율인 12.8%에 버금간다. 시드 대사는 “원주민의 의견이 많이 반영될수록 헌법에 정당성이 부여된다”며 “원주민들의 보건·복지·교육 환경 등이 나아지고 이들이 정부 직책에도 더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칠레는 국회의원 중 원주민 출신을 따로 분류하지 않는데, 현재 소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0월27일(현지시각) 칠레 산티아고시 오이긴스 공원에 시민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산티아고/EPA 연합뉴스
칠레 국민들은 왜 헌법을 다시 쓰자고 요구했을까. 시드 대사는 기존 헌법의 탄생 과정과 내용에 대한 불만이 작용했다고 했다. “헌법이 만들어진 1980년부터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비민주적인 정권(피노체트 정권) 아래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 헌법’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했지만 부족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 경제모델은 빈곤을 줄이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완벽하지 못했다. 소득불평등 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높은 게 사실이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은 미국의 ‘시카고학파’를 불러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고, 1980년에는 국민의 복지와 삶의 질보다 사유재산과 경제적 자유 등이 강조된 헌법을 만들었다. 그 결과 칠레는 남미 최초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이 되는 등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국민 다수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작’ 50원의 지하철 요금 인상이 칠레 역사상 최대 규모 시위로 이어질 정도로 국민의 불만이 팽배했다.
칠레 국민들은 새 헌법을 통해 이런 불평등이 개선되길 원한다. 시드 대사는 “국민들의 주된 불만은 불평등과 (부족한) 사회적 권리에 집중된다. 뒤처진 분야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사회, 사회 취약층과 원주민을 통합하는 사회, 더 공정하고 포용적인 경제 등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헌의회가 기후변화, 환경, 소비자 권리, 디지털 권리 같은 새로운 문제들도 다룰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공무원다운 답변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칠레 경제 발전의 핵심 요소들인 사유재산과 민간 주도에 대한 존중, 외국인에 대한 차별 없는 대우 등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제헌의원들이 만든 헌법 조항은 제헌의회의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확정되고, 이렇게 확정된 새 헌법 조항은 내년 중반 최종적으로 국민투표에 부쳐져, 과반의 찬성으로 통과된다. 새 헌법을 쓰는 동안 기존 헌법을 따르고, 국회의 역할도 그대로 유지된다. 새 헌법을 쓰는 동안 기존 헌법을 따르고, 국회의 역할도 그대로 유지된다. 글·사진 최현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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