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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동일본 대지진 후 10년…“방사능 속으로 돌아갈 순 없다”

등록 2021-03-09 20:28수정 2021-03-10 02:45

[동일본 대지진 그 후 10년]
남편은 직장 있는 후쿠시마…아내와 자녀들은 오사카
‘핵재해 이산’ 모리마쓰 가족을 통해 본 동일본 대지진
“핵으로부터 피난을 선택한 순간 ‘사회적 소수자’ 됐다”
모리마쓰 아키코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두달 뒤인 2011년 5월, 5개월 된 딸과 3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후쿠시마에서 약 600㎞ 떨어진 오사카로 삶의 터전을 옮겨 10년째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사진은 2013년 여름쯤 모리마쓰가 아들(5살, 맨 오른쪽), 딸(2살)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모리마쓰 제공
모리마쓰 아키코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두달 뒤인 2011년 5월, 5개월 된 딸과 3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후쿠시마에서 약 600㎞ 떨어진 오사카로 삶의 터전을 옮겨 10년째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사진은 2013년 여름쯤 모리마쓰가 아들(5살, 맨 오른쪽), 딸(2살)과 함께 있는 모습이다. 모리마쓰 제공

“방사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대신, 가족이 함께 사는 보통의 삶을 빼앗겼다.”

일본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 주민이었던 모리마쓰 아키코(47)는 ‘모자 피난’ 이주자다. 2011년 3월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에서 일하는 남편만 남겨놓고 자녀들과 함께 오사카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올해 10살이 된 딸의 나이가 이 가족의 피난 기간과 같다. 3살이던 아들은 중학생이 됐다.

모리마쓰는 최근 <한겨레>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스스로 피난을 선택한 순간 ‘사회적 소수자’가 됐다”고 말했다. “소수자가 되니 인권 침해가 보였고, 말을 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일본과 국제사회를 향해 원전 피해자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지진 뒤 후쿠시마를 떠난 피난자는 일본 부흥청 집계로, 2월 기준 4만1241명이다. 피난자는 대지진 때문에 주거지를 옮겼지만, 후쿠시마로 다시 돌아갈 의사가 있는 사람을 말한다. 사회적 차별과 편견 때문에 피난 사실을 숨기고, 정부가 실태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사례도 많아 실제 피난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분석된다. <한겨레>는 모리마쓰 가족의 삶을 통해, 동일본 대지진 이후 10년 ‘핵재해’ 피해자들의 고통과 일본 사회의 모습을 돌아봤다.

‘그날’ 오후 2시46분, 도호쿠지방 미야기현 앞바다 깊이 24㎞에서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일본에서 지진 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대 규모였다. 높이 10미터가 넘는 쓰나미(지진해일)가 밀려오면서 후쿠시마, 미야기, 이와테 등 태평양 연안 마을을 집어삼켰다. 또 후쿠시마 제1원전을 덮쳐 원자로 안 핵연료봉이 녹아내리는 멜트다운(1~3호기)과 폭발이 일어났다. 방사성 물질이 대기와 해양으로 대량 유출됐다. 1986년 옛 소련 체르노빌 사고 이래 최악의 원전 사고였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사망자 1만5899명, 행방불명 2527명, 재해 뒤 건강이 악화되거나 자살한 ‘재해 관련 사망자’ 3767명까지 합하면 희생자가 2만2193명에 이르는 대참사였다.

당시 모리마쓰 아키코는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의 아파트 8층에서 생후 5개월 딸아이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출근했고, 3살이던 아들은 유치원에 갔다. “흔들림이 시작됐고 지진이라고 직감했습니다. 점점 심하게 흔들리더니 가구가 쓰러지고 식기, 전자제품이 마치 날아다니듯 했어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모리마쓰는 아기의 머리를 감싼 채 식탁 아래로 몸을 피했다. 배수관이 터졌는지 거실과 방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아이를 업고 8층 계단을 걸어 나왔다. 네 식구의 보금자리는 그대로 폐허가 됐다.

집 근처에 임시로 방을 구해 생활하던 모리마쓰 가족은 사고 2개월 뒤, 아이들의 고향인 고리야마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실상 두 아이 모두 감금 생활을 했어요. 아동 학대처럼 느껴졌지만 방사능에 노출시킬 수 없었으니까요.” 3살 아들이 나가서 놀고 싶다고 조르면, 가끔 차를 몰고 2~3시간 떨어진 공원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즈음 마을에선 밖에 나갔다 돌아온 아이들이 코피를 쏟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수돗물이 오염됐고 후쿠시마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간토지방인 이바라키, 지바, 도쿄에서도 모유에서 방사성 물질이 나왔다는 뉴스가 잇따랐다. “뉴스를 보고 순간 소름이 끼쳤어요. 지진이 난 뒤 계속 오염된 물을 마셨고, 딸에게 모유 수유도 했습니다. 아무런 정보가 없었으니까요.” 모리마쓰는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 많이 울었다”고 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고리야마시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내륙으로 60㎞ 떨어져 있다. 정부 기준에 따르면 반드시 피난을 가야 하는 지역은 아니다. 사고 당시 일본 정부는 원전에서 20㎞ 이내, 방사선량이 높은 지역은 약 40㎞ 정도까지만 피난 지시를 내렸다. 위험 징후가 곳곳에 나타났기 때문에 정부가 순차적으로 피난을 지원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는 ‘부흥’, ‘힘내자’는 구호를 강조했다. “점점 피난을 말하기 힘든 분위기가 됐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직장을 다녀야 하는 남편을 홀로 두고, 3살배기 아들과 5개월 된 딸을 데리고 오사카로 이사를 왔다. 남편이 아이들을 보러 오려면 교통편이 편한 대도시가 낫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아이들과 한달에 한번 정도 만난다. 후쿠시마에서 일을 마친 뒤 금요일 밤 야간버스를 타고 토요일 아침 오사카에 도착한다. 아이들이 5~6살까지는 아빠랑 헤어질 때마다 울었다. 아이들에게 왜 가족이 떨어져 살아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빠와 떨어져 살지만, 밖에서 아무 걱정 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피난을 후회하지 않는다.

10년이 흘렀지만 모리마쓰는 “아직 후쿠시마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두려움 없이 건강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인데, “방사선 피폭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고 지점과 멀리 있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처음엔 ‘후쿠시마 피난자’라는 자신의 상황을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힘들었다. 정부가 지정한 피난 지시 구역 밖에서 살던 그는 ‘꼭 피난까지 오지 않아도 되는데, 유난 떠는 거 아닌가’, ‘정부 지원 등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시선을 자주 느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런 분위기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는 방사능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이 아닙니다. 정부는 방사능 오염을 잘 살피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긋기’를 했어요.” 모리마쓰는 상황을 회피하지 않았다. 피난을 온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 정부가 잘못한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일본 정부는 ‘강제 피난’과 이른바 ‘자주 피난’(피난 지시 구역이 아닌데 위험을 느껴 자발적으로 피난을 떠난 사람)에 대해 지원을 달리하면서 차별했다. 돈 문제가 끼어들면서 피난자 사이에도 갈등이 생겼다. 자주피난자 중에는 자신이 후쿠시마에서 왔다는 것을 숨기는 사람이 많아졌고, 지원을 받지 못해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원전에서 한번 사고가 나면 공기, 토지, 산, 바다 등 방사성 물질이 무차별적으로 퍼집니다. 방사선 피폭은 굉장히 광범위한 피해예요.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정부가 ‘선긋기’를 하면서 피해가 축소됐습니다.”

모리마쓰는 “10년 동안 일본 정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금도 자신들의 잘못은 감추고 ‘부흥’, ‘후쿠시마로 귀환’만 강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2014년 4월 다무라시 미야코지지구를 시작으로, 방사선량이 높아 사람이 살 수 없는 ‘귀환 곤란 구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피난 지시 지역을 해제했다. 하지만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을 보면, 올 1월 기준으로 피난이 해제된 11개 시·정·촌에 주민등록을 둔 주민 가운데 실제 거주자는 31.6%에 그친다. 70%가량이 귀환을 망설인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는 피난 해제 지역 주민들이 귀환하지 않으면 ‘강제 피난’이 아닌 ‘자주 피난’으로 간주해 지원을 줄이거나 없앴다.

모리마쓰는 피난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2013년 9월 그는 다른 피난민과 함께 간사이 지역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정부와 도쿄전력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들어갔다. 이들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은 사고 전의 ‘보통 생활’을 되찾기 위해 국가와 도쿄전력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개인의 존엄을 회복할 것”이라고 밝혔다. 간사이뿐만 아니라 현재 전국에서 약 30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이뤄지고 있다. 도쿄전력 전 경영진을 상대로 한 형사처벌은 2019년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2심이 진행 중이다.

모리마쓰는 2014년 9월엔 ‘생크스 앤 드림’(Thanks & Dream)이라는 피난자 모임을 만들었다. ‘모자 피난’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수가 많아, 같은 처지의 엄마들끼리 종종 만나던 것이 모임이 됐다. 재해가 나고 3년이 지나니 피난자 사이에서도 여러 변화가 생겼다. 후쿠시마로 돌아가거나 후쿠시마를 아예 떠나는 경우, 피난을 계속 하거나 이혼하는 부부도 있었다. “그냥 피난자의 지금을 알리고 싶었어요. 이런 목소리가 모아져 필요한 정책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모임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으며 피난자의 요구와 실태, 어려움을 나누는 ‘플랫폼’이 됐다.

2018년 8월, 모리마쓰는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영어로 연설했다. 그는 국제사회에 후쿠시마와 동일본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방사선 피폭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지금도 후쿠시마의 피폭 문제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거리 위, 학교, 토론회, 언론 인터뷰 등에 나서고 지난 1월엔 저서 <재해로부터 생명을 지키는 방법―내가 피난할 수 있었던 이유>(국내 미출간)를 발간했다. 기회가 된다면 원전 문제로 고민하는 한국인들과도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 했다. 일본에는 없는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평범한 주부였던 모리마쓰에겐 놀라운 변화다.

“제가 피난자의 권리만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원전은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방사선 피폭으로부터 자유’라는 것이 제대로 알려져, 기본적 인권으로 확립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핵재해’로부터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후쿠시마 피난자’ 모리마쓰가 오늘도 씩씩하게 버티는 이유다.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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