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 인근의 맥퍼슨광장에서 지난 16일 아시안 여성 6명 등 8명의 사망자를 앗아간 조지아주 애틀랜타 총격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려 한 시민이 발언하는 모습을 참가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한인 4명 등 아시아계 6명을 포함한 8명의 사망자를 낸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규탄하고 아시아계 혐오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가 21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열렸다. 지난 16일 사건 발생 뒤 애틀랜타와 뉴욕 등 대도시들로 항의 물결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도인 워싱턴에서도 첫 주말을 맞아 대규모 집회가 열린 것이다.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두 블럭 떨어진 맥퍼슨광장은 한국계를 비롯해 중국계, 베트남계 등 아시아계는 물론이고 흑인과 백인 등 다양한 시민들 1000여명으로 가득찼다. 이곳은 지난해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이름붙여진 백악관 뒷편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M)’ 광장의 한 블럭 옆이다. 맥퍼슨광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애틀랜타 총격 사건은 명백한 증오범죄”라며 이를 없애기 위해 인종을 뛰어넘은 연대로 맞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백인 남편, 아들과 함께 나온 한국계 심인보(48)씨는 “애틀랜타 총격범은 주인과 종업원들이 주로 아시아계인 업소들을 타깃삼았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아시아계 증오와 인종주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2살 때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심씨는 “아시아계 뿐 아니라 흑인, 백인들까지 이곳에 나온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며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폭력 사건이 있을 때마다 산발적인 집회들이 있었으나 이번처럼 모든 커뮤니티가 모여서 크게 하는 시위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학교에서 아시아계나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며 “이렇게 직접 나와서 보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심인보(48)씨가 21일(현지시각) 워싱턴 맥퍼슨광장에서 열린 집회에 아들과 함께 참석해 <한겨레>의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지난 16일 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한 아시안 여성 6명 등 8명의 사망자를 앗아간 조지아주 애틀랜타 총격 사건에 항의하는 이날 집회에 1000여명이 참석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사립 여고를 다니고 있는 중국계 쉬징징(17)은 이번 범행 동기로 용의자 로버트 애런 롱(21)의 성 중독에 무게를 두고 있는 수사 당국에 대해 “경찰 조직 자체가 증오범죄의 시작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다”고 말했다. 쉬는 “아시아계 여성은 미디어에 의해서 페티시즘의 대상이 돼왔고, 우리의 몸과 모습은 성적 대상화돼왔다”며 “애틀랜타 사건에는 여성혐오와 성차별, 인종주의가 교차한다. 그걸 부인하는 것은 무지한 것이다”고 목소리 높였다.
‘아시아·태평양계 혐오를 멈춰라’(STOP AAPI HATE)는 팻말을 들고 나온 흑인 남성 브라이언 알렉산더(35)는 “아시아계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가 유사하긴 하지만 특히 아시아계 형제·자매들에게 충격적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나의 지지를 보여주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알렉산더는 “소수 인종들이 따로따로 말할 때 백인 우월주의가 이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애틀랜타 사건에 대해 “총격범이 백인이고 희생자는 대부분 아시아계 여성이다. 또한 반아시아계 인종주의에 기름을 부은 팬데믹(전염병 대유행) 와중에 벌어졌다”며 “증오범죄라고 부를 정황 증거들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21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맥퍼슨광장에서 지난 16일 아시안 여성 6명 등 8명의 사망자를 앗아간 조지아주 애틀랜타 총격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려 중국계 시민 앨리슨 추가 발언하는 모습을 참가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메릴랜드대에서 미국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계 앨리슨 추는 마이크를 잡고 “아시아계, 흑인, 라티노, 유대계 등 미국 내 소수 인종들 뿐만 아니라 함께 싸울 의지가 있는 백인들과 연대해 백인우월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래야 이 잔인한 역사 속에서 무얼 했냐고 훗날 우리 손자들이 물을 때 우리가 싸워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추는 기자에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한 뒤부터 애틀랜타 사건 같은 일이 늘고 있다”며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아시아계 혐오가 줄어들 변화의 희망을 본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집회 뒤 징, 꽹과리, 북을 치면서 백악관 뒷편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광장까지 200여m를 행진했다. 이날 애틀랜타와 뉴욕에서도 같은 집회가 열렸다.
미 정치권의 아시아계 의원들도 이날 방송에 출연해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범죄로 철저하게 수사할 것을 촉구했다. 타이계인 태미 덕워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시비에스>(CBS)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 및 유사 범죄들이 인종적으로 동기부여가 됐는지에 대해 더 심도있는 수사가 이뤄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는 참석 시민들이 자신의 경험과 의견을 말하는 식으로 2시간 가량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집회 뒤 징, 꽹과리, 북을 치면서 백악관 뒷편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광장까지 200여m를 행진했다. 집회 장소 옆으로 운행하는 차량들 또한 서행하며 경적을 울려 지지를 표시했다. 이날 애틀랜타와 뉴욕에서도 같은 집회가 열렸다.
한편, 롱이 다녔던 조지아주 밀턴의 크랩애플 교회는 이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신자로 볼 수 없다”며 그를 신도 명단에서 제외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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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현지시각) 워싱턴 맥퍼슨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흑인 남성인 브라이언 알렉산더(35)가 ‘아시아·태평양계 혐오를 멈추라’고 쓴 팻말을 들고 <한겨레>에 포즈를 취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