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선적의 길이 400m 짜리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호가 25일(현지시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을 사흘째 가로막고 있는 모습을 촬영한 프랑스우주청(CNES)의 위성사진. 연합뉴스
대형 컨테이너선의 좌초로 통행이 1주일 이상 봉쇄됐던 수에즈 운하는 세계 지정학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곳이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길이 125㎞의 수에즈 지협, 그리고 이 지협을 굴착해서 19세기 후반에 완성된 길이 193㎞의 수에즈 운하는 동서양 열강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가로막는 수에즈 지협은 고대 이후 동서양의 교류와 교역을 결정한 요인이었다. 고대 이집트 및 페르시아 제국 시대 때 나일강 하류와 지협 중간에 있는 비터 호수를 거쳐 홍해로 연결하는 수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일강의 퇴적층이 쌓이고 홍해 수면이 낮아지면서, 이 수로는 역사에서 잊혀졌다.
지중해를 홍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연결하는 해로가 이 지협에 의해 막히자, 동서양의 교류는 근동 및 중동을 중개지로 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의 길, 그리고 인도양을 거쳐 페르시아만이나 홍해로 오는 바다의 길은 동지중해, 흑해, 페르시아만 연안의 도시들을 중간 기착지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동서양 교역 형태는 근동과 중동을 장악한 제국들을 융성시킨 기반이 됐다. 특히, 서기 7세기 이슬람의 출현에 의한 첫 무슬림 제국인 우마이야 왕조를 시작으로 서기 15세기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의해 그 융성이 절정에 올랐다.
동지중해, 흑해, 홍해, 페르시아만을 장악한 오스만튀르크의 중심인 이스탄불은 세계 교역의 허브가 됐다. 하지만, 15세기말 포르투칼의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직교역 항로를 개척하고 같은 시기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이 겹치면서, 서유럽의 대서양 연안이 세계 교역의 중심이 됐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을 거치면서 해양 패권이 넘어갔다. 18세기 중반에 세계 패권국으로 올라선 영국에게 가장 사활적인 해로는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 길이었다.
영국의 해양 패권을 넘보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한 19세기초부터 수에즈 운하 공사를 꿈꾸었다. 프랑스 외교관 출신인 페르디낭 드레세프는 1854년 오스만터키의 이집트 총독(군주)인 사이드 파샤로부터 공사권을 따내어, 수에즈운하회사를 설립하고는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국은 격렬히 반대했다. 아시아로 가는 희망봉 항로의 패권을 쥔 영국 입장에서는 수에즈 운하로 인한 현상변경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인 파머스턴 경은 새로운 항로가 개설되면, 영국의 상업 및 해양의 배타적 이익이 박탈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국의 반대와 난공사에 대한 우려로 수에즈운하회사의 자본 모집은 지지부진하다가, 당시 유럽 최대의 금융자본인 유대계 로스차일드 은행이 나서서 해결됐다. 파리에 있던 로스차일드 형제의 하나인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이 회사 주식과 채권 발행과 인수를 맡아, 자본을 모아줬다. 수에즈운하는 1859년부터 1869년까지 10년의 공사 끝에 완공됐고, 이는 세계 물류혁명과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런던에서부터 아라비아해까지 가는 항로를 거리로는 약 8900㎞, 당시 시간으로는 한달(현재는 8~10일) 가까이 단축했다.
운하 개통은 오스만터키 몰락을 가속화했다. 운하로 인해 이스탄불 등의 교역기능이 더욱 위축됐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를 지켜만 보던 영국은 1875년 당시 이집트 총독이 재정파탄으로 자신의 운하 지분 20만주를 400만파운드에 팔려는 정보를 얻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당시 영국 총리는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의 라이오넬 로스차일드에게 급전을 빌려 이 지분을 전격적으로 취득한 뒤, 나중에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로스차일드 은행 가문이 수에즈 운하 공사를 가능케했고, 영국의 참가도 성사시켜 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수에즈운하는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운영하게 됐다.
제1, 2차 세계대전 동안 수에즈 운하는 참전국들의 각축의 대상이 됐고, 영국이 이를 터키와 독일로부터 사수했다. 2차대전 뒤 중동분쟁뿐 아니라 열강의 부침, 미-소의 냉전의 중심에도 수에즈 운하가 있었다. 이집트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전격적으로 선포했다. 나세르는 자신의 경제개발 정책을 위해서 나일강에 아스완댐을 지으려고 미국 등 서방에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운하 국유화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려고 했다. 법적으로도 1968년까지 자신들의 운영권이 유효했던 영-프는 이스라엘과 공모해, 운하를 무력으로 탈취하려는 2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이 그 해 10월 선공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자, 영-프는 중재를 명목으로 군사력을 진주시켰다. 이집트를 지원하던 소련이 핵전쟁을 위협했고, 영-프의 독자적 행동에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도 격분했다. 아이젠하워는 영-프에게 자금줄 차단을 위협하자, 영-프는 결국 백기투항했다. 운하에 배를 폭파시켜 통행을 단절시켰던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 됐다. 영-프는 이 사건으로 중동에서 세력이 완전히 퇴조했다.
1957년 4월 운하가 재개됐으나, 1967년 ‘6일 전쟁’으로 다시 폐쇄됐다.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다시 점령하자, 이집트는 15척의 배로 운하를 폐쇄시켰다. 이 폐쇄는 1975년까지 무려 8년 동안 계속됐다.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뿐 아니라 중동에서 자신들의 지정학적 입지를 인정하라고 전 세계를 향해 시위한 것이다. 이집트가 1974년 이스라엘을 상대로 4차 중동전쟁을 벌인 뒤에야, 전후 협상에 운하 재개가 들어가 1975년 6월5일에 재개통됐다. 당시는 4차 중동전쟁에 촉발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금수 조처로 오일쇼크가 절정으로 치닫던 때였다. 석유값을 앙등시키는 물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운하 개통이 절박했던 때였다.
수에즈 운하는 중동분쟁의 판도도 바꾸었다. 이집트는 운하의 주 고객인 미국 등 서방과 경제적 이해가 더 밀착됐고, 이는 미국이 후원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으로 운하가 서방의 완전한 통제 하에 들어갔다. 이집트가 아랍의 맹주로서 지위를 잃고,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지위를 승계했다. 이슬람혁명을 일으킨 이란을 저지하는 일에 사우디가 선두에 섰기 때문이다.
에버기븐호 좌초 사태로 인해, 수에즈 운하는 디지털 시대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교역로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해로의 폐쇄나 불안정은 빠른 시간내에 전 세계 물류파동으로 이어지고, 장기적으로는 열강 세력 판도의 부침으로 귀결되는 것을 역사가 보여준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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