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의 공격으로 8850㎞의 송유관을 폐쇄한 미국 최대 송유관 업체 ‘컬로니얼 파이프라인’의 석유 저장 창고. 우드빈/EPA 연합뉴스
미국 동부 지역에 석유류를 공급하는 송유관 운영회사가 ‘랜섬웨어 공격’(컴퓨터를 마비시킨 뒤 돈을 요구하는 해킹 수법)으로 3일째 마비 상태에 빠지자, 미 정부가 9일(현지시각) 석유 수송을 위해 긴급사태를 선언했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낙후한 에너지 기반 시설의 허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 교통부는 이날 밤늦게 텍사스, 펜실베이니아, 뉴욕 등 미 동·남부 18개 주 지역에 긴급사태를 선언하고 “이 조처는 가솔린·경유 등을 공급하는 컬로니얼 송유관 시스템 마비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조처에 따라 가솔린 같은 석유 제품을 육로로 긴급 수송하는 것과 관련된 각종 규제가 일시 해제됐다.
애틀랜타주에 본사를 둔 ‘컬로니얼 파이프라인’은 지난 7일 랜섬웨어 공격을 받아 컴퓨터 시스템이 마비되자 8일 미 남부 멕시코만 인근 지역과 동부를 연결하는 5500마일(약 8850㎞)의 송유관을 폐쇄했다. 하루 250만 배럴의 원료를 운송하는 이 송유관은 동부 지역 석유류 수요의 45%를 책임지고 있다. 미국 최대 송유관 업체인 이 회사는 지난 2002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30번 송유관 운영을 일시 중단했는데, 해킹에 따라 운영을 중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컬로니얼 파이프라인의 미 남부~동부 구간 파이프라인. AP 연합뉴스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조 바이든 행정부는 송유관 운영 정상화를 최우선 과제로 다루고 있다”며 “석유 공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송유관 운영사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해킹 공격은 범죄 집단 ‘다크 사이드’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조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조직은 기업들로부터 돈을 훔쳐 자선단체 등에 기부하는 걸 활동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 해커 집단은 단 2시간만에 이 회사의 컴퓨터에서 100기가바이트에 가까운 자료를 빼내 갔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회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송유관이 며칠 안에 정상화될 경우, 유가 상승까지 유발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해커들이 컬로니얼 파이프라인의 핵심 시스템까지 침투했다면 에너지 업계 전반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지적했다. 송유관, 정유 시설, 발전소 등 에너지 관련 시설을 통제하는 많은 시스템이 정교한 해킹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보호 장치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보안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신문은 이런 취약점은 미국 정부와 업계 관계자들도 몇 년 전부터 익히 인지해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