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의 기자가 다이애나 왕세자비 인터뷰를 성사시키려 문서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 방송이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런던의 비비시 본사 건물. 런던/EPA 연합뉴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의 기자가 다이애나 왕세자비 인터뷰를 성사시키려고 문서를 조작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영국 방송의 간판’ <비비시>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공영방송은 가구당 연간 25만원에 달하는 수신료를 바탕으로 영국을 넘어 전세계로 영향력을 확대해왔다는 점에서, 보도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이번 비리 파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비비시>의 의뢰로 진행된 다이애나 인터뷰 관련 비리 조사 결과가 20일(현지시각) 발표되자 왕실 인사들과 정치권이 비판을 쏟아내는 가운데, 정부가 감독 강화와 방송 수신료 삭감 또는 동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일간 <더 타임스> 등이 22일 보도했다.
대법관 출신 존 다이슨 경이 이끈 조사팀은, 1995년 이 방송의 마틴 바시어 기자가 다이애나의 동생 찰스 스펜서에게 조작된 문서를 제시해 다이애나 인터뷰를 성사시켰다고 발표했다. 다이슨 경은 “바시어가 부적절하게 행동했고 <비비시>의 취재보도 기준을 심각하게 어겼다”고 지적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왕실 직원 등이 자신을 감시하면서 돈을 받은 것처럼 암시하는 조작 문서를 접한 이후 인터뷰에 응했다. 그가 이 인터뷰에서 남편인 찰스 왕세자와 커밀라 파커 볼스의 불륜을 폭로하면서 왕세자 부부 관계는 파경을 맞았다. 다이애나는 2년 뒤 프랑스 파리에서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조사 발표 직후 다이애나의 아들 윌리엄 왕세손은 입장문을 내어 “이 인터뷰가 부모님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며 “<비비시>의 행위가 어머니의 두려움과 편집증, 고독을 부추겼다는 것을 알게 돼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해리 왕자도 “착취 문화와 비윤리적 행위의 파급 효과”를 비판하며 “이번 조사는 정의와 진실을 항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왕자들의 강도 높은 규탄 이후 당시 뉴스 총책임자였던 토니 홀 전 사장이 국립미술관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또, 영국 정부는 <비비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감독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일간 <가디언>이 전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조처를 취하기를 바란다고 밝혔고, 로버트 버클랜드 법무장관은 이 사건이 방송 지배구조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는 또 가구당 연 159파운드(약 25만원)인 방송 수신료를 앞으로 5년 동안 동결하거나 삭감하는 방안을 놓고 방송 경영진과 협상하고 있다고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방송의 수신료 수입은 한해에 32억파운드(약 5조1천억원)에 달하며, 이는 지난해 총 매출의 60%를 훌쩍 넘는다. 이런 자금을 바탕으로 <비비시>는 8개 지상파 텔레비전 채널을 비롯해, 라디오, 인터넷 미디어 서비스를 전국민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이 방송의 영향력은 영국 내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시엔엔>(CNN) 등의 위성방송에 대응해 1991년부터 24시간 뉴스 방송을 전세계에 내보내고 있다. 이 회사의 온라인 뉴스 사이트는 이용자 규모에서 세계 10위 안에 드는 뉴스 매체다. 이밖에 드라마 등 오락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비비시 엔터테인먼트> 등 외국 대상 상업 방송도 거느리고 있다.
영국 방송계에서는 그동안 이 방송사 조직의 공룡화를 꾸준히 비판했으나, 경영진은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해 규제를 최소화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엔 영국에서 특히 민감한 왕실 문제가 얽혀 있어,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운 압박을 받을 전망이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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