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학자 위안룽핑의 2013년 모습. 신화 연합뉴스
91살의 농학자 위안룽핑의 별세 소식에 중국인들의 추모 열기가 뜨겁다. 그의 장례식에 수 천 개의 화환이 쇄도했고, 중국 카카오톡 웨이보의 그의 별세 소식을 담은 해시태그를 10억3천만명이 읽고, 118만개의 댓글이 달렸다.
위안룽핑은 22일 오후 중국 후난성 창사의 한 병원에서 장기의 기능이 쇠퇴해 별세했다고 <런민일보>가 전했다. 24일 창사의 밍양산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열리기까지, 사흘 동안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조문 행렬이 3㎞가량 길게 이어졌다. 그의 운구차가 이동할 때는 도로를 통제했고, 수천 명의 시민이 뒤를 따랐으며 주변 차량들이 경적을 울려 추모했다. 그가 졸업한 충칭시 시난대학에 세워진 그의 동상 앞에도 수많은 꽃다발이 놓였다.
중국인들이 노 과학자의 죽음을 이렇게 추모하는 이유는 벼 전문가인 그가 중국의 식량 문제 해결에 상당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벼 증산에 성공해 세계 최대 인구국인 중국에 안정적인 식량 조달을 가능케 한 것을 높이 사는 것이다.
1930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위안룽핑은 1953년 충칭시 시난농업대를 졸업한 뒤 후난성 안장의 농업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약 2천만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1958~1961년 마오쩌둥 주석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지켜보면서 쌀 증산의 의지를 다진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시민들이 그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창사/신화 연합뉴스
위안룽핑과 그의 연구진은 1973년 기존 벼보다 생산량이 20% 더 많은 교잡 벼 재배에 성공했다. 연간 7천만명이 추가로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런민일보>는 위안룽핑의 교잡 벼가 인도와 베트남, 필리핀, 미국, 브라질 등지에서 대규모로 재배되고 있다며 세계적으로 전체 벼의 20%가 그가 개발한 교잡 벼에서 비롯한 품종이라고 전했다.
<신화통신>은 사설을 통해 “그는 일생을 논에서 보내며 수억 명의 인구가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며 “오늘날 교잡 벼의 1묘 당 생산량은 1500㎏을 돌파해 중국인은 중국 쌀이 가득 담긴 밥그릇을 확실히 보장받게 됐다”고 평했다.
24일 중국 후난성 창사의 밍양산 장례식장에 위안룽핑을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창사/신화 연합뉴스
중국 당국도 그의 성과를 높이 사, 지난 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을 기념해 제정한 중국 최고 훈장인 공화국 훈장을 수여했다. 2004년에는 식량 분야에 공헌한 이들에게 주는 상인 세계 식량상을 받았다.
친근한 외모로 야외연구 때 ‘농민’으로 자주 오해받았다는 그는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학술행사나 중국 공산당 행사 등에 참여할 때면, 그를 알아본 젊은층들이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도 자주 연출됐다.
그는 고령임에도 올해 초까지 현장 연구를 계속했다. 최근 연구는 염류 알칼리 토양에서 자라는 벼를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2018년 두바이에서 이 품종을 시범 재배하기도 했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