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10일 당시 조 바이든(왼쪽) 미국 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모스크바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장외에서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러시아에 미온적이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은 푸틴을 ‘살인자’(killer)라고 부르고, 미 대선개입이나 사이버 공격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하고 제재를 가하는 등 미-러 관계는 악화했다. 주요7개국(G7),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럽연합과의 연쇄 정상회의를 포함한 바이든의 이번 유럽 방문을 통틀어 미 언론은 ‘오랜 외교 경력의 바이든’과 ‘옛 소련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 푸틴’의 대좌를 최대 이벤트로 주목하고 있다.
푸틴이 이례적인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을 한껏 조롱하며 사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엔비시>(NBC) 방송은 지난 11일 모스크바에서 촬영한 푸틴 인터뷰를 14일 공개했다. 푸틴은 ‘바이든은 대러시아 관계에서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을 원한다’는 질문에 “그것들은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받은 뒤 “2011년 리비아 붕괴를 기억할 때, 무슨 예측가능성과 안정성이 있었냐. 아프가니스탄 주둔 군대도 갑자기 확!”이라고 반문했다. 미국이 리비아 혼란 때 방치하고, 최근 아프간에서 갑작스럽게 철군 결정을 내렸다고 비꼰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가 2016·2020년 미 대선에 개입하고, 미 정부기관과 송유관 회사, 육가공업체 등에 대한 사이버 공격 배후라는 미국의 주장에도 “미국은 단 하나의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비난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우리가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BLM) 운동을 도발했다는 비난을 안 받고 있는 게 놀랍다”, “다음번에는 부활절 달걀이 공격당했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다. 끝나지 않는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고 비난했다.
푸틴은 러시아의 반체제 인사인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암살을 지시했느냐는 질문에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누구를 암살하는 버릇이 없다”고 발끈했다. 그러면서 1월6일 미 의사당 난입사태를 언급하면서 기자에게 “의회에 들어갔다가 경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에 대해 당신이 암살을 지시했냐”고 되물었다. 그는 난입한 이들이 “정치적 요구(의견)” 때문에 구속된 것이라는 주장도 폈다. 그러면서 “못생겼으면 거울을 보고 화내지 말라는 말이 있다”며 “누군가 우리를 비난할 때 나는 ‘자신을 들여다보지 그러냐’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나발니가 감옥에서 살아나올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이 나라에서 그런 건 대통령이 아니라 법원이 결정한다”며 “의료시설이 최상의 상태는 아니더라도 있긴 있으니 그들이 적절히 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두고 “냉전의 유물”이라며 “왜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푸틴은 ‘당신은 살인자냐’는 질문에는 즉답은 피한 채 “임기 동안 나는 모든 종류의 공격에 익숙하다”고 답변했다.
푸틴은 그러면서도 바이든과 타협의 여지도 남겼다. 그는 바이든을 트럼프와 달리 오랜 정치 경험을 가진 전문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사이버 해킹 범죄자를 상대국에 인도하는 문제, 또한 각자 억류 중인 상대국의 민간인을 맞교환하는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도 푸틴에게 할 말을 하겠다는 뜻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1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푸틴에게 우리가 협력할 영역이 있다는 것을 말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그가 사이버 보안 등과 관련해 과거에 했던 식으로 행동하면 우리는 똑같이 대응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은 “우리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분야에서는 레드라인(금지선)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수감 중인 나발니에 대해 “그가 죽는다면 러시아가 기본적 인권을 지킬 의도가 거의 없거나 전무하다는 또 하나의 징표일 것”이라며 “비극일 것이다. 러시아와 전 세계, 그리고 나와의 관계를 해치기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1년 부통령 시절에 푸틴을 만났던 바이든은 푸틴에 대해 “영리하고 터프하다”며 “자격 있는 적수”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이 푸틴을 살인자라고 불렀다는 인터뷰 질문에 푸틴이 웃었다”는 물음에 웃으면서 “이게 대답이다. 나도 웃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그가 예전에 그가 할 수도 있는 것들 혹은 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방송에서 (‘푸틴이 살인자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한 것”이라며 “이번 만남에서 그게 크게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푸틴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유럽 순방에 나서기 전 외부 전문가 그룹을 모아 조언을 들었다고 <액시오스>는 보도했다. 트럼프 정부 시절의 관료 출신 등으로 이뤄진 이 그룹은 바이든에게 미-러 정상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을 열거나 푸틴이 대화에서 관심을 가로챌 만한 기회를 주지 말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바이든과 푸틴은 회담 뒤 따로따로 기자회견을 연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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