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도 꺾지 못한 학문의 의지
70대 일본인이 한국의 재벌 연구로 23일 박사모를 썼다. 그의 논문이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난치병과 싸우면서 나와 더욱 빛나고 있다. 제목은 〈한국 재벌과 기업거버넌스-엘지의 역사와 경영발전〉.
야마네 신이치(75)는 교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는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학위를 받게 됐다”며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야마네가 새롭게 향학열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은 1999년이었다. 인쇄기계 업체에서 일해온 그는 정년퇴직 이후의 삶을 고심한 끝에 공부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57년 교토대 졸업 이후 42년 만에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학부 시절 재벌·기업그룹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 분야를 주제로 삼고, 해외영업 경험을 살릴 겸 아시아 나라와 일본의 경제 관계를 연구하기로 했다. 자연스레 일본과 비슷한 기업 시스템을 가진 한국이 떠올랐고, 삼성·현대에 비해 연구가 덜 된 엘지그룹을 택했다. 야마네는 자신의 논문이 엘지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거의 유일한 것이라며 “외부 눈으로 바라본 한국 재벌의 장단점이 한국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배구조의 투명성 확보가 최대 과제”라며 재벌총수 1인지배 체제와 싸워온 한국 시민단체들 노력에 경의를 나타냈다.
한국을 10여차례 방문하는 등 연구에 열중해온 그에게 2003년 7월 박사과정 진학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비가 찾아왔다. 척추뼈가 하나씩 세차례나 부러졌다. 병명은 다발성 골수종. 4개월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제 부작용은 물론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병이 깊을수록 열정은 더 솟구쳐 2년여만인 지난해 8월 ‘초고속으로’ 논문작성을 끝냈다. 열정이 삶의 의지를 북돋워 가까운 곳은 지팡이 짚고 다닐 정도로 건강도 회복했다.
야마네는 고령에 항암치료를 받고 있지만 앞으로도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라며, “기회가 주어지면 대학 강단에도 서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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