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양극화와 전쟁중] ② 일본
올 초부터 일본의 한 민영텔레비전에서 <파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자격증 26개를 보유하고 시급 3000엔(약 2만3천원)을 받는 ‘슈퍼 파견사원’의 좌충우돌 활약을 통해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일본사회의 현실을 코믹하게 꼬집는 내용이다.
14일 방영된 6회분은 드라마로서는 올리기 힘든 20.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여기서 요즘 ‘격차’(양극화)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양극화 문제는 4월 지방선거와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야당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는 최근 “고이즈미·아베 정권 6년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양극화가 심화한 나라가 됐다”고 포문을 열었다. 민주당은 양극화 문제를 최대 쟁점으로 내세워 지원세력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렌고)와 연대하고 있다. 민주당과 렌고는 전체 비정규직 1707만명 중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파트타임과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양극화 해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민주당은 구체적으로 △주요 국가 중 최저수준인 시급(전국평균 673엔)을 1000엔으로 끌어올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창설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2005년 기준으로 일본의 파트타임과 아르바이트 직원은 1266만명이었다. 10년 전에 비해 370만명이 늘어난 수치다. 이는 전체 고용자 네명 중 한 명 꼴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급여수준은 남성은 정규직의 50%, 여성은 70%에 머물고 근속연수가 쌓여도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개혁 등 경쟁력 확대정책이 비정규직 양산
잇따른 개선대책 불구 엄청난 재정적자로 실효성 의문
야당의 공세에 맞서 자민당 정부도 발빠르게 ‘단기간 노동자의 고용관리개선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기업들이 비정규직의 임금을 정규직과 형평에 맞도록 대우하고, 정규직 전환 기회도 제공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개정안의 실제 적용 대상자는 전체 파트타임 노동자의 4~5%에 불과하다.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만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이와 별도로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프리타’(2005년 기준 201만명), 구직활동을 포기한 젊은이 ‘니트’(64만명), 생활보호대상 가구(104만가구), 모자가정(123만명) 등 저소득층의 생활수준 향상을 겨냥한 ‘성장력 저변 끌어올리기 전략’을 16일 긴급 제출했다. 그 내용은 △공적기관이 직업훈련 수강 경력 등을 기재하는 증명서를 발행하는 ‘잡카드’ 제도 창설 △기업 내 연수와 학교교육을 합친 프로그램 제공 △생활보호 모자가정의 취업률을 현재 48%에서 60%로 확대 △중소기업의 하청거래 적정화와 경영개선 등을 통한 임금인상 등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복지에서 고용으로’라는 5개년 추진계획으로 발표된 이번 대책은 보름 만에 급조돼 예산마련 방안이 포함돼 있지 않은데다, 일본 정부가 내년도 예산의 핵심 사안으로 추진 중인 ‘재도전 지원책’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또 ‘워킹 푸어’(일하는 빈곤층)에 대한 대책은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자민당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요미우리신문>은 이를 ‘궁여의 격차대책’이라며 비판했다. 신문은 “정부가 본보기로 삼은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의 뉴딜정책은 2005년에만 450억엔 정도의 예산을 투입해 고용증가를 통한 실업수당 감소, 세수 증가 효과를 낳았다”며 “그러나 아베 정권은 재정 지출에 소극적이어서 새 제도가 얼마나 뿌리내릴지 미지수”라고 평가했다. 아베 정권이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정지출에 소극적인 이유는 엄청난 재정적자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율 저하와 인구 고령화에 따라 연금과 의료보험 등 각종 사회보험 비용이 매년 수천억엔씩 늘어나 재원마련이 쉽지 않다. 재정문제는 2001년 출범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체제의 5년간에 걸친 구조개혁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금융구조 개편 등 각종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해 오늘날 일본 기업의 경쟁력 확대와 경기회복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한편으론 기업환경 개선에 치중한 나머지 기업환경 조성을 명목으로 각종 세금을 내려 막대한 재정적자와 양극화 확대라는 유산도 함께 물려주었다. 1980년대 70%였던 소득세 최고세율이 현재 40%까지 내렸으며, 상속세의 최고세율도 2003년 70%에서 50%로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게이단련의 요구에 따라 법인세 인하까지 거론되고 있다. 아베 총리 역시 고이즈미 개혁노선에 따라 경제성장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각종 사회복지 혜택을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험난해진 중산층 되는 길 날품팔이 성행…비정규직 3명중 1명
빈곤율 9년새 두배가량 늘어 15.3%
파트타임으로 장애인을 돌보는 미즈스나 준(34)은 올해가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35살이 넘으면 정규직이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즈스나는 17일 <한겨레> 기자와 만나 “혼자 살 때는 몰랐는데 3년 전 결혼하고 아이도 생기고 나니 반듯한 직장에 취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반쯤 포기한 듯했다. 경기회복으로 고교 졸업생 취업률이 80%에 육박한다지만, 그는 이미 취업하기에는 너무 늦은 ‘잃어버린 세대’(25~36살)이기 때문이다.
“하루 10시간 정도 일하는데 그 때마다 시간이 달라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어요. 정규직으로 취업하려면 여기저기 알아봐야 하는데 시간을 내기도 어렵네요.”
현재 그의 한 달 수입은 약 20만엔(156만원) 가량. 부인이 주말에 슈퍼마켓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벌어들이는 수입 7만여엔을 합쳐도 생활은 빠듯하다. 월 8만6천엔의 집세를 내고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각종 보험을 내고 나면 저축은 생각도 못한다. 미즈스나의 경우에서 보듯, 일본에서 중산층이 되는 길은 점점 험난해지고 있다.
한때 ‘1억 총중류’라는 말이 구가되고 소득격차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적은 나라(1993년)였던 일본의 ‘영광’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오히려 일본은 요즘 심각한 양극화 사회로 변모하는 중이다.
최근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발표를 보면, 일본의 빈곤율은 1996년 8%에서 2005년 15.3%로 급증해 주요국가 중 세번째로 높게 나타났다. 또 소득격차 수준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2002년 0.4983으로 크게 높아져 0.5에 근접했다. 지니계수는 0과 1 사이의 값을 갖는데, 0.5를 넘으면 불균형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1~2년 새 인원 절감 등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한 일본 기업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성장의 그늘은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다. 경기침체 때는 잠복해 있던 양극화 문제가 경기회복을 틈타고 분출하는 상황이다.
일본에서 소득격차가 심화한 가장 큰 요인은 비정규직의 급증이다. 2006년 9월 현재 일본의 파트타임 노동자를 비롯해 아르바이트, 파견사원, 계약사원 등을 합친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는 1707만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33.4%에 이른다. 96년 20.9%였던 비정규직이 10년 새 13%포인트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일본에서 거품경기가 꺼진 뒤 기업들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일제히 정규직 채용을 억제하고 그 대신 비정규직 채용을 늘린 결과다.
최근에는 취업이 되지 않는 젊은이를 겨냥해 휴대전화 한 통으로 간단히 날품팔이를 할 수 있는 ‘스폿파견’이라는 새로운 고용형태도 생겨나고 있다. 파견사원은 일정 기간 계약하는 것인데 반해, 스폿파견은 휴대전화나 전자우편으로 당일 날품팔이해서 급료를 받는 형태다.
비정규직 차별반대 운동단체인 전국유니온의 가모 모모요(57) 회장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스폿파견은 각종 명목으로 떼이는 게 많고 쓸데없이 붙잡아두는 시간이 적지않아 실제 시급은 최저임금 이하인 500엔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파견사원과 달리 사회보험도 없고 안전대책도 미비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고층 빌딩이 밀집해 있는 도쿄 신주쿠역의 한 건물 입구에서 노숙자들이 낡은 담요 등을 덮고 잠을 자고 있다.‘1억 총중류’를 자부하던 일본에선 최근 양극화가 확대되면서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도쿄/류우종 <한겨레21>기자 wjryu@hani.co.kr
잇따른 개선대책 불구 엄청난 재정적자로 실효성 의문
소득격차 확대의 주요 요인
그러나 ‘복지에서 고용으로’라는 5개년 추진계획으로 발표된 이번 대책은 보름 만에 급조돼 예산마련 방안이 포함돼 있지 않은데다, 일본 정부가 내년도 예산의 핵심 사안으로 추진 중인 ‘재도전 지원책’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또 ‘워킹 푸어’(일하는 빈곤층)에 대한 대책은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자민당 정권에 비교적 호의적인 <요미우리신문>은 이를 ‘궁여의 격차대책’이라며 비판했다. 신문은 “정부가 본보기로 삼은 영국 토니 블레어 정부의 뉴딜정책은 2005년에만 450억엔 정도의 예산을 투입해 고용증가를 통한 실업수당 감소, 세수 증가 효과를 낳았다”며 “그러나 아베 정권은 재정 지출에 소극적이어서 새 제도가 얼마나 뿌리내릴지 미지수”라고 평가했다. 아베 정권이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정지출에 소극적인 이유는 엄청난 재정적자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출산율 저하와 인구 고령화에 따라 연금과 의료보험 등 각종 사회보험 비용이 매년 수천억엔씩 늘어나 재원마련이 쉽지 않다. 재정문제는 2001년 출범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체제의 5년간에 걸친 구조개혁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금융구조 개편 등 각종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해 오늘날 일본 기업의 경쟁력 확대와 경기회복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한편으론 기업환경 개선에 치중한 나머지 기업환경 조성을 명목으로 각종 세금을 내려 막대한 재정적자와 양극화 확대라는 유산도 함께 물려주었다. 1980년대 70%였던 소득세 최고세율이 현재 40%까지 내렸으며, 상속세의 최고세율도 2003년 70%에서 50%로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게이단련의 요구에 따라 법인세 인하까지 거론되고 있다. 아베 총리 역시 고이즈미 개혁노선에 따라 경제성장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각종 사회복지 혜택을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험난해진 중산층 되는 길 날품팔이 성행…비정규직 3명중 1명
빈곤율 9년새 두배가량 늘어 15.3%
일본 정규직·비정규직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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