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전자정부 구축의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 염종순(48) 사장은 “나는 한국에서 ‘전자정부’라는 물을 들여와 파는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엔에이치케이(NHK)>의 한 기자는 그에게 ‘현대판 조선통신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한겨레가 만난 사람] ‘지자체 클라우드’ 지휘 염종순 사장
한국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삭풍이 몰아치던 1997년 12월 말.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35살의 벤처사업가 염종순씨는 창가 너머로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때, 공고와 전문대를 나와 서울시 말단 공무원을 거친 그가 돈과 학연도 없이 열정만으로 키운 노엘정보테크는 부도 위기에 몰려 있었다. 거래하던 재벌 계열사인 정보시스템개발 업체가 돌연 하청 중단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직원 40명을 파견해 시스템 개발업무를 1년 계획으로 하청받아 착수한 지 불과 1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대기업 하청 일이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하고 있어 급작스러운 계약 해지는 타격이 컸죠. 중소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로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대기업을 통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하청구조가 너무 싫었어요. 게다가 저는 빽도 줄도 없는 주변인이었어요.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없다고 봤지요.” 그가 노트북 1대만 갖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이유였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지난해 12월27일, 염씨는 일본정부가 추진하는 전자정부 구축사업에 새로운 역사를 쓴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인터뷰/ 김도형 도쿄특파원 aip209@hani.co.kr
일본 사가현 산하의 시·마치(한국의 시·군·구에 해당) 정보시스템을 하나로 묶어 공동 운영하는 ‘지방자치단체(지자체) 클라우드’ 사업을 진두지휘한 게 바로 염종순 사장이다. 주민등록 등 주민 정보와 건강보험, 연금관련 업무를 공동 이용함으로써 중복 투자를 피하고 프로세스 개선 등 업무 효율화를 꾀한 본격적인 ‘지자체 클라우드’ 사업은 일본에서 사가현이 처음이다. 현재 6개 시에 적용해 운영중인 이 사업은, 시범사업을 거쳐 사가현의 전체 20개 시·마치로 확대될 예정이다. 홋카이도, 교토 등 다른 현에서도 지자체 클라우드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 전자민원 등 일부에만 적용할 뿐, 핵심업무까지 통합운영하는 건 사가현이 유일하다.
부도 낸 벤처사업가 “하청구조 너무 싫어” 일본행
‘저비용 고효율’ 공공부문 정보화 사업으로 재기 공공 부문의 정보화 컨설팅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이코퍼레이션닷제이피’ 대표인 염 사장은 사가현 정보업무개혁과 정보기획감(과장급)과 아오모리시 정보정책보좌관(부장급)이라는 공무원 신분도 갖고 있다. 2007년 한국국적으로는 처음으로 사가현청의 임기직 공무원(5년)에 채용된 그는 이듬해 총무성을 설득해 ‘지자체 클라우드’ 사업 예산 4억5천만엔을 따냈다. 2004년 사가시의 전자지자체 구축사업, 2008년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의 행정 업무처리절차 개선 및 행정업무 시스템 개선사업 등 그가 맡은 크고작은 전자정부 구축 실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23일 <아사히신문>은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의 ‘저비용 고효율’ 전자정부 구축 성공사례와 염 사장의 숨은 공로를 경제면 특집기사로 크게 소개했다. 일본의 대표적 시사프로그램인 ‘클로즈업 현대’는 염 사장을 두번이나 초대손님으로 불러 전자정부 구축 문제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가전분야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정도로 배타적인 일본 시장에서, 한국의 무명 벤처사업가가 일본 전자정부 사업의 전도사로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사가현 시스템 통합…한국인 첫 현청 공무원 뽑혀
“김대중·노무현 시절 선진적 전자정부 덕 톡톡히” 염 사장의 살아온 과정을 보면 참 극적이군요. 일본 전자정부 시장을 파고들 수 있었던 배경이 우선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과거 10년간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쌓아올린 선진적인 한국 전자정부의 모델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예컨대 이번 사가현의 지자체 클라우드 사업은 한국 지역정보개발원에서 개발한 ‘새올행정시스템’이란 소프트웨어와 유사한 것으로, 사가현 20개 지자체가 공동 사용할 소프트웨어를 만들자는 것이죠. 한국은 2007년부터 232개 전국 지자체가 공동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은 1,800개 지자체가 각자 행정업무시스템을 개발하기 때문에 중복 투자로 인한 비용 낭비가 심각합니다. 일본 지자체의 행정시스템 개발 및 운영비로 투자되는 돈이 매년 6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강연을 통해서 한국의 전자정부 성공사례를 소개해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더라구요. 그래서 제 강연을 들은 정치인, 기업체 사장, 언론인 등을 개별적으로 모아 한국의 전자정부 혁신 현장을 보여주는 ‘인터넷콜럼버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박3일에 1인당 20만엔의 비싼 투어이지만 지금까지 10년간 약 4500여명이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가현 지자체 클라우드의 예산 편성에 도움을 준 총무성 공무원이나 사가시, 우라소에시의 전산담당 공무원, 2004년 사가시장 재임 당시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 모델을 들여와 전자지자체 구축사업을 추진했던 기노시타 도시유키도 인터넷콜럼버스의 맴버이다. 기노시타 전 사가시장은 현재 염 사장 밑에서 부사장을 맡아, 지자체 정보시스템 개혁에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해 5월에 나온 그의 저서에 발문을 써준 와타나베 요시미 ‘모두의 당’ 대표(전 금융·행정개혁담당상)도 염 사장 지지자의 한 사람이다. 일본의 전자정부·전자지자체 구축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은 거액의 돈을 들여 전자정부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전자정부법도 존재하지 않아요. 구체적인 전자정부 구축의 목적도 명확하게 하지 않은 채 이제까지의 업무를 그대로 전산화하는 데 그치는 바람에 기대할 만한 효과를 얻을 수가 없는 거지요. 예컨대 일본 외무성의 여권신청시스템은, 3년간 신청건수가 100여건 뿐입니다. 약 3억엔을 투입했는데 지난해 사용 중지가 된 실정입니다. 이밖에도 방위성, 문부성 등의 전자민원시스템이 지난해 폐지됐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관여했던 지방자치단체의 기막힌 실태를 전했다. “전자민원 시스템을 4억엔에 개발해 가동한 뒤 3년이 지난 시스템이 있는데요. 그간 누적 민원 신청건수는 몇 건인가 담당 공무원에게 확인하니 ‘단 한 건도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매년 유지보수비는 얼마나 들어가느냐니까 ‘연간 2,500만엔’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유지관리업체 관계자를 만나, 남은 기간 시스템을 정지시키는 조건으로 2년간 유지관리비 5천만엔을 환불해달라고 요청했다. “업체 쪽에서 계약서를 근거로 거절하기에, 환불해주지 않으면 언론에 이러한 실태를 제보하겠다고 해서 관철시켰어요.” 몇몇 대기업 독점하는 일 정보통신 분야 비효율적
한국에 유리한 블루오션…학사업무쪽 진출계획 정보시스템 개발과 유지 관리에 그렇게 많은 예산이 허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에서 전자정부 구축사업은 엔티티(NTT)그룹, 후지쓰, 엔이시(NEC), 히타치제작소 등 ‘아이티 제네콘’으로 불리는 몇몇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고 수주금액을 업자가 쥐락펴락합니다. 또한 가동 이후에도 시스템 관리의 저작권까지 보유함으로써 막대한 유지관리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정보시스템 구축예산을 집행하는 공무원 가운데 정보통신 전문가가 없다 보니, 예산 산정단계부터 업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죠.” 그는 주객이 전도된 일본 전자정부 구축 실태를 한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나라처럼 전산직 공무원 제도도 없고, 전자정부 구축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사회진흥원과 브레인 집단이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일본정부에 이런 점을 개선하도록 건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세계 2위 규모인 일본의 정보통신 분야는 한국기업이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파고들 여지가 많은 ‘블루오션 시장’이라는 게 염 사장의 진단이다. 사업에 관련된 일본 대기업의 반발이 대단했겠군요 “되지도 않을 일을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다, 한국 정보산업의 일본 진출을 위해 활동하는 산업스파이다 등등 별별 음해성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자정부 개발 경험을 가진 한국의 정보시스템 개발기업들이 실제 참여해 그간의 노하우와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시스템 구축을 성공적으로 종료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많이 줄었습니다. 많은 일본 공무원들이 제 지지자가 됐으니까요.” 1980년대말 3년간 기술연수 시절 그에게 정보기술을 가르쳐준 히타치정보시스템은 자체적으로 생산해오던 무인전자민원발급기 제작을 포기하고 염 사장의 대리점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한국의 무인 전자민원 발급기를 일본에 싼 가격에 보급하는 일도 겸하는 염 사장의 제품에 경쟁력을 잃고, 갑과 을의 신분이 바뀐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국 전자정부 시스템의 뛰어난 점은 무엇인가요 “단적으로 전자입찰 문제로 두 나라를 비교할 수 있죠. 한국의 기업체는 조달청 나라장터시스템에 업자 등록을 한 번만 하면 언제든지 중앙정부, 전국 지자체 및 공공기관의 전자입찰에 참여할 수 있어요. 반면 일본은 ‘아이티 제네콘’으로 불리는 몇몇 대기업 이외에는 수주하기 힘든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어요. 40여개 중앙부처와 1,800개 지자체가 있지만 각각의 전자입찰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일일이 부처별 또는 지자체별로 업자 등록을 해야 합니다. 탈관료를 당면 개혁 목표로 내세우는 민주당 정부가 이 문제만 해결해도 관청의 예산 낭비를 많이 줄일 수 있지요.” 실제 한국의 전자정부 시스템은 2005년 유엔의 세계 전자정부 순위에서 5위를 차지했고, 서울시는 세계 100대 도시 전자정부 평가에서 3회 연속 1위를 기록했다. 특히 강남구청의 경우 미국의 정보화사회포럼으로부터 3년 연속으로 세계 7대 정보화 도시상을 수상했다. 그는 정보시스템개발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서간 것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일본이 독자기술을 중시하는 노하우(know-how)에 집착한 데 비해 한국은 남의 기술을 가져다 쓰는 노웨어(know-where)의 시대를 잘 이용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인터넷기술을 예로 들어보죠. 일본 엔티티는 수천억엔의 개발비를 투자해 종합정보통신망(ISDN) 방식을 개발 보급했죠. 한때 한국통신도 이를 도입하여 보급하였지만 잠시 뒤에 포기하고 통신속도가 높고 경쟁력 있는 기술인 비동기디지털가입자회선(ADSL) 방식으로 갈아탔습니다. 엔티티는 ADSL 방식이 좋은 줄은 알지만 수조원을 들여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ISDN 기술을 사장시킬수 없다는 생각에 상당기간 ISDN 방식을 고집했고, 그 결과 인터넷비즈니스는 우리나라가 선점할 수 있었지요.” 처음에 전자정부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뭡니까? “2000년 일본에서 회사를 설립하려고 회사소재지인 주오구 구청을 갔을 때 일입니다. 필요한 증명서류의 신청서를 작성해 창구에 제출하자 담당공무원이 ‘인감증명을 떼려면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당연히 깜짝 놀랐죠. 그래서 우리의 선진 사례를 적용하면 일본시장에서 사업 경쟁력이 있겠구나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기회가 먼저 찾아왔다. “불법체류중 사망한 한국인을 위한 모금과정에서 알게 된 성누가병원 원장이 ‘후지쓰에 전자 진료기록 구축사업을 15억엔에 발주했는데 계속해서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저한테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병원의 정보기술(IT) 어드바이저로서 후지쓰를 상대로 싸우게 됐는데, 그때 그들의 정보시스템 구축능력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게 됐죠.” 현재 구상중인 사업은 어떤 게 있습니까? “일본에서는 아직도 학교의 학사업무가 전산화되지 않았어요. 개발업체들이 교무시스템이라는 프로그램을 한 학교당 3천만엔에 팔고 있어요. 3만5천개에 이르는 일본 공립 초·중등학교를 모두 합치면 9조엔의 시장입니다. 저는 1천억엔 정도 들여서 모든 학교가 공동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자고 일본 문교당국을 설득중입니다. 현재 교무시스템은 워낙 비싼 가격이라 돈이 없는 학교는 구매할 엄두를 못 내는데 한국의 나이스(국가교육정보시스템) 시스템을 모델로 삼아 추진하고자 합니다.” 일본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어떤 얘기를 하시겠습니까? “호랑이보다 곶감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실체를 보지 않으면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컨대 최근 만난 한국의 공무원들이 가스미가세키 클라우드(일본의 중앙정부 부처 40여곳을 한데 묶은 시스템)에 관심을 많이 보이기에 한마디 했어요. ‘그것은 한국에서 먼 저 훌륭하게 시행하고 있다’고. 기업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가 2004년 처음 사가시 시스템 구축에 관여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카르텔을 형성중인 일본기업들만으로는 공정 경쟁이 어렵다고 판단해, 한국기업의 수주 참가를 실현시키기 위해 사가시 시장을 설득했다. 결국 입찰 방식을 지명입찰에서 공개경쟁 입찰로 바꿨다. 그러나 염 사장이 입찰을 권유한 한국 기업은 처음엔 “공정경쟁의 가능성이 없다”며 거절했다. 염 사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입찰에 참여한 이 업체는 그 이후 일본 지자체 전자정부 구축사업의 중요한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일본시장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은 일본 사회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그는 지난해 현대자동차의 일본시장 철수 사례를 예로 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제가 일본 차를 팔고 현대 차를 구입했는데, 차를 판 뒤엔 영업사원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더라구요. 일본 차를 구입했을 때는 영업사원이 매달 한번씩 찾아와 차량상태를 점검해주고 경제적인 운전과 안전운전을 위해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래서는 일본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시장이 폐쇄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저비용 고효율’ 공공부문 정보화 사업으로 재기 공공 부문의 정보화 컨설팅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이코퍼레이션닷제이피’ 대표인 염 사장은 사가현 정보업무개혁과 정보기획감(과장급)과 아오모리시 정보정책보좌관(부장급)이라는 공무원 신분도 갖고 있다. 2007년 한국국적으로는 처음으로 사가현청의 임기직 공무원(5년)에 채용된 그는 이듬해 총무성을 설득해 ‘지자체 클라우드’ 사업 예산 4억5천만엔을 따냈다. 2004년 사가시의 전자지자체 구축사업, 2008년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의 행정 업무처리절차 개선 및 행정업무 시스템 개선사업 등 그가 맡은 크고작은 전자정부 구축 실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23일 <아사히신문>은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의 ‘저비용 고효율’ 전자정부 구축 성공사례와 염 사장의 숨은 공로를 경제면 특집기사로 크게 소개했다. 일본
“김대중·노무현 시절 선진적 전자정부 덕 톡톡히” 염 사장의 살아온 과정을 보면 참 극적이군요. 일본 전자정부 시장을 파고들 수 있었던 배경이 우선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과거 10년간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쌓아올린 선진적인 한국 전자정부의 모델 덕을 톡톡히 봤습니다. 예컨대 이번 사가현의 지자체 클라우드 사업은 한국 지역정보개발원에서 개발한 ‘새올행정시스템’이란 소프트웨어와 유사한 것으로, 사가현 20개 지자체가 공동 사용할 소프트웨어를 만들자는 것이죠. 한국은 2007년부터 232개 전국 지자체가 공동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은 1,800개 지자체가 각자 행정업무시스템을 개발하기 때문에 중복 투자로 인한 비용 낭비가 심각합니다. 일본 지자체의 행정시스템 개발 및 운영비로 투자되는 돈이 매년 6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강연을 통해서 한국의 전자정부 성공사례를 소개해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더라구요. 그래서 제 강연을 들은 정치인, 기업체 사장, 언론인 등을 개별적으로 모아 한국의 전자정부 혁신 현장을 보여주는 ‘인터넷콜럼버스’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2박3일에 1인당 20만엔의 비싼 투어이지만 지금까지 10년간 약 4500여명이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가현 지자체 클라우드의 예산 편성에 도움을 준 총무성 공무원이나 사가시, 우라소에시의 전산담당 공무원, 2004년 사가시장 재임 당시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 모델을 들여와 전자지자체 구축사업을 추진했던 기노시타 도시유키도 인터넷콜럼버스의 맴버이다. 기노시타 전 사가시장은 현재 염 사장 밑에서 부사장을 맡아, 지자체 정보시스템 개혁에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해 5월에 나온 그의 저서에 발문을 써준 와타나베 요시미 ‘모두의 당’ 대표(전 금융·행정개혁담당상)도 염 사장 지지자의 한 사람이다. 일본의 전자정부·전자지자체 구축사업이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은 거액의 돈을 들여 전자정부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전자정부법도 존재하지 않아요. 구체적인 전자정부 구축의 목적도 명확하게 하지 않은 채 이제까지의 업무를 그대로 전산화하는 데 그치는 바람에 기대할 만한 효과를 얻을 수가 없는 거지요. 예컨대 일본 외무성의 여권신청시스템은, 3년간 신청건수가 100여건 뿐입니다. 약 3억엔을 투입했는데 지난해 사용 중지가 된 실정입니다. 이밖에도 방위성, 문부성 등의 전자민원시스템이 지난해 폐지됐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관여했던 지방자치단체의 기막힌 실태를 전했다. “전자민원 시스템을 4억엔에 개발해 가동한 뒤 3년이 지난 시스템이 있는데요. 그간 누적 민원 신청건수는 몇 건인가 담당 공무원에게 확인하니 ‘단 한 건도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매년 유지보수비는 얼마나 들어가느냐니까 ‘연간 2,500만엔’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유지관리업체 관계자를 만나, 남은 기간 시스템을 정지시키는 조건으로 2년간 유지관리비 5천만엔을 환불해달라고 요청했다. “업체 쪽에서 계약서를 근거로 거절하기에, 환불해주지 않으면 언론에 이러한 실태를 제보하겠다고 해서 관철시켰어요.” 몇몇 대기업 독점하는 일 정보통신 분야 비효율적
한국에 유리한 블루오션…학사업무쪽 진출계획 정보시스템 개발과 유지 관리에 그렇게 많은 예산이 허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에서 전자정부 구축사업은 엔티티(NTT)그룹, 후지쓰, 엔이시(NEC), 히타치제작소 등 ‘아이티 제네콘’으로 불리는 몇몇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고 수주금액을 업자가 쥐락펴락합니다. 또한 가동 이후에도 시스템 관리의 저작권까지 보유함으로써 막대한 유지관리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정보시스템 구축예산을 집행하는 공무원 가운데 정보통신 전문가가 없다 보니, 예산 산정단계부터 업자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죠.” 그는 주객이 전도된 일본 전자정부 구축 실태를 한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꼴”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나라처럼 전산직 공무원 제도도 없고, 전자정부 구축의 사령탑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사회진흥원과 브레인 집단이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일본정부에 이런 점을 개선하도록 건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세계 2위 규모인 일본의 정보통신 분야는 한국기업이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파고들 여지가 많은 ‘블루오션 시장’이라는 게 염 사장의 진단이다. 사업에 관련된 일본 대기업의 반발이 대단했겠군요 “되지도 않을 일을 한다,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다, 한국 정보산업의 일본 진출을 위해 활동하는 산업스파이다 등등 별별 음해성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자정부 개발 경험을 가진 한국의 정보시스템 개발기업들이 실제 참여해 그간의 노하우와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시스템 구축을 성공적으로 종료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많이 줄었습니다. 많은 일본 공무원들이 제 지지자가 됐으니까요.” 1980년대말 3년간 기술연수 시절 그에게 정보기술을 가르쳐준 히타치정보시스템은 자체적으로 생산해오던 무인전자민원발급기 제작을 포기하고 염 사장의 대리점으로 전환했다고 한다. 한국의 무인 전자민원 발급기를 일본에 싼 가격에 보급하는 일도 겸하는 염 사장의 제품에 경쟁력을 잃고, 갑과 을의 신분이 바뀐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국 전자정부 시스템의 뛰어난 점은 무엇인가요 “단적으로 전자입찰 문제로 두 나라를 비교할 수 있죠. 한국의 기업체는 조달청 나라장터시스템에 업자 등록을 한 번만 하면 언제든지 중앙정부, 전국 지자체 및 공공기관의 전자입찰에 참여할 수 있어요. 반면 일본은 ‘아이티 제네콘’으로 불리는 몇몇 대기업 이외에는 수주하기 힘든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어요. 40여개 중앙부처와 1,800개 지자체가 있지만 각각의 전자입찰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일일이 부처별 또는 지자체별로 업자 등록을 해야 합니다. 탈관료를 당면 개혁 목표로 내세우는 민주당 정부가 이 문제만 해결해도 관청의 예산 낭비를 많이 줄일 수 있지요.” 실제 한국의 전자정부 시스템은 2005년 유엔의 세계 전자정부 순위에서 5위를 차지했고, 서울시는 세계 100대 도시 전자정부 평가에서 3회 연속 1위를 기록했다. 특히 강남구청의 경우 미국의 정보화사회포럼으로부터 3년 연속으로 세계 7대 정보화 도시상을 수상했다. 그는 정보시스템개발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서간 것은 패러다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일본이 독자기술을 중시하는 노하우(know-how)에 집착한 데 비해 한국은 남의 기술을 가져다 쓰는 노웨어(know-where)의 시대를 잘 이용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인터넷기술을 예로 들어보죠. 일본 엔티티는 수천억엔의 개발비를 투자해 종합정보통신망(ISDN) 방식을 개발 보급했죠. 한때 한국통신도 이를 도입하여 보급하였지만 잠시 뒤에 포기하고 통신속도가 높고 경쟁력 있는 기술인 비동기디지털가입자회선(ADSL) 방식으로 갈아탔습니다. 엔티티는 ADSL 방식이 좋은 줄은 알지만 수조원을 들여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ISDN 기술을 사장시킬수 없다는 생각에 상당기간 ISDN 방식을 고집했고, 그 결과 인터넷비즈니스는 우리나라가 선점할 수 있었지요.” 처음에 전자정부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뭡니까? “2000년 일본에서 회사를 설립하려고 회사소재지인 주오구 구청을 갔을 때 일입니다. 필요한 증명서류의 신청서를 작성해 창구에 제출하자 담당공무원이 ‘인감증명을 떼려면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당연히 깜짝 놀랐죠. 그래서 우리의 선진 사례를 적용하면 일본시장에서 사업 경쟁력이 있겠구나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기회가 먼저 찾아왔다. “불법체류중 사망한 한국인을 위한 모금과정에서 알게 된 성누가병원 원장이 ‘후지쓰에 전자 진료기록 구축사업을 15억엔에 발주했는데 계속해서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저한테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래서 병원의 정보기술(IT) 어드바이저로서 후지쓰를 상대로 싸우게 됐는데, 그때 그들의 정보시스템 구축능력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게 됐죠.” 현재 구상중인 사업은 어떤 게 있습니까? “일본에서는 아직도 학교의 학사업무가 전산화되지 않았어요. 개발업체들이 교무시스템이라는 프로그램을 한 학교당 3천만엔에 팔고 있어요. 3만5천개에 이르는 일본 공립 초·중등학교를 모두 합치면 9조엔의 시장입니다. 저는 1천억엔 정도 들여서 모든 학교가 공동이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자고 일본 문교당국을 설득중입니다. 현재 교무시스템은 워낙 비싼 가격이라 돈이 없는 학교는 구매할 엄두를 못 내는데 한국의 나이스(국가교육정보시스템) 시스템을 모델로 삼아 추진하고자 합니다.” 일본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인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어떤 얘기를 하시겠습니까? “호랑이보다 곶감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실체를 보지 않으면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컨대 최근 만난 한국의 공무원들이 가스미가세키 클라우드(일본의 중앙정부 부처 40여곳을 한데 묶은 시스템)에 관심을 많이 보이기에 한마디 했어요. ‘그것은 한국에서 먼 저 훌륭하게 시행하고 있다’고. 기업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가 2004년 처음 사가시 시스템 구축에 관여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카르텔을 형성중인 일본기업들만으로는 공정 경쟁이 어렵다고 판단해, 한국기업의 수주 참가를 실현시키기 위해 사가시 시장을 설득했다. 결국 입찰 방식을 지명입찰에서 공개경쟁 입찰로 바꿨다. 그러나 염 사장이 입찰을 권유한 한국 기업은 처음엔 “공정경쟁의 가능성이 없다”며 거절했다. 염 사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입찰에 참여한 이 업체는 그 이후 일본 지자체 전자정부 구축사업의 중요한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일본시장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은 일본 사회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그는 지난해 현대자동차의 일본시장 철수 사례를 예로 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제가 일본 차를 팔고 현대 차를 구입했는데, 차를 판 뒤엔 영업사원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더라구요. 일본 차를 구입했을 때는 영업사원이 매달 한번씩 찾아와 차량상태를 점검해주고 경제적인 운전과 안전운전을 위해 여러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래서는 일본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시장이 폐쇄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