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앞두고 24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옥(88·왼쪽 둘째) 할머니가 한 참가 학생의 발언을 듣다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전북 익산에서 살아온 이점례(89) 할머니가 지난 11일 뇌출혈로 타계한 소식이 23일에야 뒤늦게 알려지는 등 고령의 피해자들이 잇따라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숙박료 없는 30엔” 유혹에 가난한 처녀 ‘솔깃’
마쓰바라 “어려움 뚫고 고향에 소포 부치기도”
마쓰바라 “어려움 뚫고 고향에 소포 부치기도”
일제시대 때 트럭제도에서 근무했던 전 군무원 마쓰바라 마사루(85)의 증언 속에 나타난 20대의 어린 조선처녀들은 위안소에서 성적 착취를 당하는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 <제이피뉴스>(JPnews.kr)가 보도한 마쓰바라 인터뷰에 따르면, 젊은 조선처녀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는 밤 10시 이후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도, 가족들에게 물품을 보내는 등 가족 사랑을 놓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마쓰바라는 위안소를 관리하는 관리부대에 근무했던 탓에 위안소에 있는 조선처녀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위안소에 끌려온 조선처녀들은 마쓰바라에게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또 눈물도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일제 때 위안소에 갔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가난과 가족사랑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쓰바라는 이들이 대부분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든가, 병원에서 사무볼 사람을 찾는다는 그런 내용”의 구인광고에 속아서 온 이들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제시된 급여는 30엔, 거기에다 숙박료도 식대도 무료라고 적혀 있어 가난한 가정의 조선 처녀들에는 큰 유혹이 됐을 것이라고 것이다. 당시는 소수만 다닐 수 있었던 중학교 졸업생의 초봉이 40엔이 불과했던 시절이다. 거기가 숙박료와 식대가 모두 무료니까 “아, 이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모집에 응했을 것이라고 마쓰바라는 회상했다.
하지만, 이들이 위안소에 도착했을 때 겪었을 낭패감과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좁은 방으로 들어오는 군인들과 한달에 한번 성병 검사를 하기 위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막사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상황, 더군다나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없는 생활은 눈물이 하루도 마를날이 없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어린 조선처녀들은 밤 10시 ‘업무’가 끝나면 삼삼오오 한 방에 모여 눈물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서로 눈물로만 상처를 매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쓰바라는 특히 미도리라는 이름의 위안부를 잊지 못한다고 밝혔다. 미도리는 20대 초반의 이 조선 처녀가 위안소에서 불리던 이름. 당시 위안소에 있던 모든 종군위안부들은 자신들의 한국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마쓰바라는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 며 소포를 건네 줬다”며 “그땐 그 정도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하지만 이들의 지옥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쉽지 않다. 위안소를 벗어난다 해도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더욱 커다란 장벽이 돼 그들의 발걸음을 묶어놓는다. 마쓰바라는 “위안부 중에서는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 청년과 도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으나, 아마도 그들이 그 섬을 벗어났을 것으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마쓰바라는 이들 위안부들 중 살아 남은 이들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병원선을 타고 일본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하지만, 이들이 위안소에 도착했을 때 겪었을 낭패감과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좁은 방으로 들어오는 군인들과 한달에 한번 성병 검사를 하기 위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막사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상황, 더군다나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없는 생활은 눈물이 하루도 마를날이 없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어린 조선처녀들은 밤 10시 ‘업무’가 끝나면 삼삼오오 한 방에 모여 눈물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서로 눈물로만 상처를 매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쓰바라는 특히 미도리라는 이름의 위안부를 잊지 못한다고 밝혔다. 미도리는 20대 초반의 이 조선 처녀가 위안소에서 불리던 이름. 당시 위안소에 있던 모든 종군위안부들은 자신들의 한국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마쓰바라는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 며 소포를 건네 줬다”며 “그땐 그 정도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하지만 이들의 지옥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쉽지 않다. 위안소를 벗어난다 해도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더욱 커다란 장벽이 돼 그들의 발걸음을 묶어놓는다. 마쓰바라는 “위안부 중에서는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 청년과 도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으나, 아마도 그들이 그 섬을 벗어났을 것으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마쓰바라는 이들 위안부들 중 살아 남은 이들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병원선을 타고 일본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