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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위안소에서도 식지 않는 조선처녀들 가족사랑

등록 2010-04-24 17:46수정 2010-05-01 11:06

3·1절을 앞두고 24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옥(88·왼쪽 둘째) 할머니가 한 참가 학생의 발언을 듣다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전북 익산에서 살아온 이점례(89) 할머니가 지난 11일 뇌출혈로 타계한 소식이 23일에야 뒤늦게 알려지는 등 고령의 피해자들이 잇따라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3·1절을 앞두고 24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집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순옥(88·왼쪽 둘째) 할머니가 한 참가 학생의 발언을 듣다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전북 익산에서 살아온 이점례(89) 할머니가 지난 11일 뇌출혈로 타계한 소식이 23일에야 뒤늦게 알려지는 등 고령의 피해자들이 잇따라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숙박료 없는 30엔” 유혹에 가난한 처녀 ‘솔깃’
마쓰바라 “어려움 뚫고 고향에 소포 부치기도”
일제시대 때 트럭제도에서 근무했던 전 군무원 마쓰바라 마사루(85)의 증언 속에 나타난 20대의 어린 조선처녀들은 위안소에서 성적 착취를 당하는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잃지 않았다. <제이피뉴스>(JPnews.kr)가 보도한 마쓰바라 인터뷰에 따르면, 젊은 조선처녀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는 밤 10시 이후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도, 가족들에게 물품을 보내는 등 가족 사랑을 놓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마쓰바라는 위안소를 관리하는 관리부대에 근무했던 탓에 위안소에 있는 조선처녀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위안소에 끌려온 조선처녀들은 마쓰바라에게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또 눈물도 많이 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일제 때 위안소에 갔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가난과 가족사랑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쓰바라는 이들이 대부분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든가, 병원에서 사무볼 사람을 찾는다는 그런 내용”의 구인광고에 속아서 온 이들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제시된 급여는 30엔, 거기에다 숙박료도 식대도 무료라고 적혀 있어 가난한 가정의 조선 처녀들에는 큰 유혹이 됐을 것이라고 것이다. 당시는 소수만 다닐 수 있었던 중학교 졸업생의 초봉이 40엔이 불과했던 시절이다. 거기가 숙박료와 식대가 모두 무료니까 “아, 이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마음으로 모집에 응했을 것이라고 마쓰바라는 회상했다.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하지만, 이들이 위안소에 도착했을 때 겪었을 낭패감과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좁은 방으로 들어오는 군인들과 한달에 한번 성병 검사를 하기 위한 외출을 제외하고는 막사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상황, 더군다나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없는 생활은 눈물이 하루도 마를날이 없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어린 조선처녀들은 밤 10시 ‘업무’가 끝나면 삼삼오오 한 방에 모여 눈물로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서로 눈물로만 상처를 매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쓰바라는 특히 미도리라는 이름의 위안부를 잊지 못한다고 밝혔다. 미도리는 20대 초반의 이 조선 처녀가 위안소에서 불리던 이름. 당시 위안소에 있던 모든 종군위안부들은 자신들의 한국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마쓰바라는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 며 소포를 건네 줬다”며 “그땐 그 정도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하지만 이들의 지옥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쉽지 않다. 위안소를 벗어난다 해도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더욱 커다란 장벽이 돼 그들의 발걸음을 묶어놓는다. 마쓰바라는 “위안부 중에서는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 청년과 도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으나, 아마도 그들이 그 섬을 벗어났을 것으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마쓰바라는 이들 위안부들 중 살아 남은 이들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병원선을 타고 일본으로 보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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