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 이전에 맺은 협정도 원천무효”
일 식민지배 한국인 피해배상 제기도
정부차원 인식공유땐 양국관계 급진전
일 식민지배 한국인 피해배상 제기도
정부차원 인식공유땐 양국관계 급진전
한일 양국에서 각각 100여명의 지식인이 서명해 10일 발표한 ‘한일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은 양국 시민사회가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한일병합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둘러싸고 양국 사이에 인식이 크게 갈라지는 뿌리인 만큼, 이에 대한 인식 공유는 양국간 화해·협력을 위해 맨 먼저 넘어야할 과제다. 그리 쉽지않은 사안에 양국의 지식인들이 처음으로 생각의 일치를 이뤄낸 것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성명은 100년 전 일제의 조선 병합을 ‘불의·부정·부당’한 것으로 단정했다. 한일병합은 일본이 조선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저항을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것이었으며, 병합조약도 절차와 형식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한일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체결된 양국간 협정의 효력에 대해서도 “ ‘원천 무효’라는 한국 쪽 해석을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성명은 밝히고 있다.
이런 역사인식은 한국인들에게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정부는 물론이고 주류 역사학계도 인정하기 꺼려왔던 사안이라 파장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 정부는 1995년 종전 50주년을 맞아 당시 무라야마 도이미치 총리가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역사인식이 오히려 퇴행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성명은 일본 지식인들의 용기있는 결단에 의해 나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일병합 조약이 원천무효라는 것은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인이 입은 피해를 일본이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뜻도 된다. 성명은 이 문제 또한 피해가지 않고 “고통은 치유해야 하고, 손해는 배상해야 한다”고 원칙을 밝혔다. 다만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대립하는 문제’라고 표현하고, 미루지 말고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역사인식이 양국에서 보편화되고 정부 차원의 인식공유로 이어진다면, 양국간 화해·협력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척될 수 있다. 지식인들은 이번 성명을 ‘한일 양국의 정부와 국민’에게 호소하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7월까지 서명을 추가로 받아, 8월에는 양국 정부에도 제출할 계획이다.
그러나 공동성명이 일본에서 당장 큰 파급력을 갖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국의 경우 진보·보수를 망라한 지식인 집단이 공동성명에 참가했지만, 일본에선 ‘비판적 지식인’ 집단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본 내 인식 확산을 위해서는 활발한 논의가 필요한데, 여건이 썩 여의치 않다.
하토야마 내각은 동아시아 공동체를 표방하는 등 전향적 자세를 보였지만,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에 묶여 있다. 한일관계 개선에 강한 의욕을 보인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은 정치자금 사건에 발이 묶여 있다.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는 “지식인 집단의 영향력이 과거에 견줘 많이 떨어진데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일본 정치권 상황을 고려할 때 한일관계 사안은 주목도가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공동성명이 한일간 역사인식 공유의 새 물꼬를 터놓은 것만은 분명하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