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영국 정부와 뉴질랜드 원주민들이 식민화 협정인 ‘와이탕기 조약’을 맺는 과정이 1923년 웰링턴에서 열린 힌 전시회에서 재연된 모습. 조약문에 서명하는 한 원주민 추장 곁에서, 영국 선교사는 다른 추장과 악수하고 있다. 이 조약을 체결하는 데 선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 정부 누리집
배상·약탈토지 반환 협정 체결
원주민 투쟁과 정부 노력 결실
원주민 투쟁과 정부 노력 결실
뉴질랜드 북섬의 시골, 마타마타는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호빗족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 ‘샤이어’로 나온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뉴질랜드 원주민들도 호빗족처럼 사이좋게 살았다. 하지만 신대륙에 눈독들인 유럽인들이 몰려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서양인들과 원주민 사이에 무분별한 토지거래가 일어나고 분쟁이 잦아졌다. 1840년 2월6일 영국 정부는 원주민들과 사실상의 ‘식민지 조약’(와이탕기 조약)을 맺었다. 영국 정부는 이 땅에서 통치권과 독점적인 토지 매입권을 행사하는 것을 보장받는 한편 원주민들은 영국 백성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협약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마오리족들은 억울하게 땅을 빼앗겼다. 백인들의 차별에도 시달렸다. 애초에 조약이 영어에서 마오리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마오리들이 이해한 것보다 더 광범위하게 권리가 박탈됐다는 논란도 일었다. 이는 1850년대 원주민들의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자는 ‘마오리 킹’(킹티아탕가) 운동으로 이어졌다.
<알자지라>는 지난 24일 뉴질랜드 정부가 마타마타에서 살아온 부족인 응가티 하우어한테 과거의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고 보도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또한 1050만달러에 이르는 금전적 배상을 하고,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기로 하는 협약을 이 부족 대표들과 체결했다.
응가티 하우어가 이번에 이룬 성취는 원주민들의 오랜 투쟁과 뉴질랜드 정부의 지속적인 화해 노력 덕분이다. 1960년대 원주민들은 와이탕기 조약의 부당함과 차별을 시정하고자 투쟁했고, 정부는 1980년대부터 사과·배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과거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려는 과정이었다. 역사학자, 원주민들의 증언 등 광범위한 조사를 거친 끝에 뉴질랜드 정부는 1995년 와이카토 나이누이 부족연합에 1억7000달러를 배상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응가티 하우어 부족에 대한 배상도 이 흐름 속에 놓여있다.
<알자지라>는 이 배상 협상 결과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원주민들의 경험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깊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번 기회를 통해 응가티 하우어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위레무 타미하나에 대한 역사적 조명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19세기에 북섬 중부 지역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추장이었던 타미하나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이 공존할 방법을 모색했다. 이와 함께 마오리킹 운동을 주도해 1856년 첫 왕을 탄생시키는 촉매 구실을 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그를 위험인물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응가티 트러스트 위원회의 공동의장인 모코로 질레트는 “150년 전 땅을 잃었을 때 우리는 파편화됐고,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며 “이제 우리는 고유한 문화적 자산과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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