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2세 박수남 감독은 1991년 뒤늦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알고 난 뒤 26년째 피해 할머니들의 투쟁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진 조기원 기자
“위안부 피해자들이 12살, 13살 때 끌려갔다는 증언을 하는 것을 듣고 어쩌면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1990년대 투쟁과 현재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을 만든 재일동포 박수남(82·) 감독은 20여년 세월 동안 위안부 문제에 천착해온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거의 같은 대답을 한다.
지난 9일 도쿄에서 만난 박 감독은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는 나와 나이 차이가 2~3살밖에 안 나 동년배나 거의 다름없는 이들도 많았다. 어쩌면 내 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1935년 일본 미에현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다.
<침묵>은 지난해 한국 디엠지(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고, 추가 편집을 거쳐 새달 도쿄 시부야에서 개봉한 뒤 일본 전역에서 순회 상영할 예정이다.
박 감독이 위안부 피해자 관련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 출신 위안부 피해자 중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알린 고 배봉기 할머니의 인터뷰가 담긴 다큐 <아리랑의 노래: 오키나와에서의 증언>을 1991년 발표했다. 일본에서 20만명의 관객이 이 다큐를 봤다.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 거주 위안부 피해자 중 처음으로 실명으로 증언한 것보다 먼저였다.
최근작 <침묵>은 1994년 위안부 피해자 14명이 일본에 와서 일본 정부의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활동을 했을 때의 기록과 생존 피해자인 이옥선(90) 할머니의 최근 모습을 보여주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길고 어려웠던 투쟁사를 되새긴다.
박 감독은 2015년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 이후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 이야기를 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다. 최근 후쿠이현에서 <침묵>을 상영한다고 하자, ‘위안부 문제는 한-일 합의로 해결됐는데 왜 이런 영화를 상영하느냐’는 항의가 상영관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는 “<오키나와에서의 증언>을 상영할 때도 ‘위안부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사회 전체를 봐도, 내가 어렸을 때 ‘조선인은 냄새가 나니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폭언이 있었지만 지금의 헤이트스피치처럼 ‘조선인을 죽여라’고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우려했다.
<침묵>은 오랜 세월 박 감독이 찍어 보관해온 필름의 일부를 편집한 것이다. 그는 3·1 운동 당시 제암리 교회 학살 사건, 일제 시대 규슈 지역 강제징용 등에 대해서도 촬영한 필름이 있는데 이를 편집해 영화로 공개하고 싶다고 했다. <침묵> 촬영과 편집의 상당 부분을 담당한 딸 마의씨는 “영화 제작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 제작 지원을 받을 방법을 찾고 싶다”고도 말했다. <침묵>도 상영 비용 마련을 위해서 일본에서 크라우드펀딩을 벌였으며, 260여명이 약 200만엔(약 2000만원)을 기부했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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